[레히삼/제윱] Moira
1
이번 대의 유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침내 한숨을 돌리겠네.'하고 누군가 말했다. 조조는 부정하지 않았다. 유비의 이름을 잇는 자의 능력은 대개 도움이 되니까. 아직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어있던 자리가 채워지겠군! 드디어 세 명이 됐어!"
마침 임무를 끝내고 한숨 돌리러 온 것인지 음료를 마시던 손책이 시원하게 말했다. 그의 소란스런 감상에 동참하고 싶진 않았지만 조조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비어있는 자리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조와 손책의 자리 가운데에 있는 초록색의 의자였다.
본부를 총괄하는 군주의 자리는 총 세 개. 조조, 손책, 유비. 그 중 조조와 손책의 이름은 이미 잇는 자가 나왔으나 유비의 자리는 근 9년간 공석이었다. 전대과 후대의 사이에 공백이 있을 수는 있으나 보통 다른 영웅도 아닌 군주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었으니 걱정의 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한 것도 사실. 그런데 이제는 삼군주가 모두 나타난 것이다. 이제 막 들어온 녀석이니 군주 일을 곧바로 잘 해낼 거란 보장은 없어도 위촉오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는 건 안심되는 일. 마침내 주군이 나타났다며 기쁨으로 술렁이는 촉진영을 보던 손책은 딱 한 명, 언짢아하는 사람을 보면서 킬킬 웃었다.
"왜 그래, 제갈량.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다며?"
"네, 믿지 않습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서류를 들고 있던 청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비어있는 자리의 위에 모든 서류를 올려놓았다.
"그럼 어서 촉의 군주가 나타난 걸 기뻐해야지? 너 그간 대리 군주 하느라 힘들었잖아."
"당연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으나, 손책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떨떠름함을 금방 읽어낼 수 있었다. 차라리 대리 군주 일을 더 하겠소, 까지 나오진 않았지만 제갈량은 확실히 유비의 등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있었고, 그에겐 그럴 이유가 있었으니 손책은 납득할 수 있었다.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녀석이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게 우스워 놀리고도 싶었지만 집요하게 파고 들면 미운털이 박혀서 어려운 임무를 모두 몰아서 하게 될 테지. 더 몰아붙이지는 않기로 했다. 히어로 6년차, 제갈량이란 사람을 알게 된 시간도 6년차. 손책도 이제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제갈량의 이름을 잇는 자와 유비의 이름을 잇는 자 사이의 운명이 이번에도 적용될지 궁금한 마음을 속으로 감춰놓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2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고 계셨는데 이제야 유비님을 발견했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자신을 서서라고 소개한 여성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유비는 어색하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이유를 모르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제 이름이 그렇게 큰 가치를 갖고 있던 것인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유비는 이 나라의 건국 신화 같은 건 잘 몰랐다. 그래서 신화 속 영웅들의 이름이 대대로 물려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도, 자신의 이름이 대단한 영웅의 이름인 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가 제 이름을 유비라고 개명한 걸까? 어차피 갖게 될 이름이라서?
"히어로 기관의 사람들이 다 영웅의 이름을 잇는다는 건 처음 알았어."
"그러셨구나. 저도 원래 서서란 이름이 아니었어요. 지금에야 서서가 더 익숙해졌지만."
서서는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이 세계 사람이라면 모두 알 상식을 유비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도 이 사람은 그런 그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히어로 기관의 사람은 모두 이렇게 친절한 걸까 아니면 그녀만 이런 걸까. 어쨌든 덕분에 유비는 그녀에게서 앞으로 머무르게 될 곳에 대한 설명은 실컷 들었다.
"저희의 임무는 두 가지에요. 첫 번째는 사람들의 원한이 만들어내는 마물, 흑군주들을 없애는 건데요, 이건 아마 유비님이 투입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전투거든요. 전쟁. 유비님의 능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 부분은 전투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해서, 유비님은 두 번째 임무 쪽으로 먼저 투입될 거에요. 흑군주들을 만들어내는 악당 '장각'이 저희의 최종 악당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두세요."
"응."
장각에 대해서는 유비도 들은 바가 있다. 신문이나 뉴스에도 간혹 나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세계의 멸망을 바라며 사람들을 꼬셔서 마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데, 마물이라는 이름치고는 괴물보다 군인의 모습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유비는 '초보자가 흑군주를 대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훈련이 필요할 것'는 서서의 의견에 동의했다.
"두 번째 임무는, 시민들을 돕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이 쪽 임무가 더 많아요. 주로 큰 화재가 났다거나 큰 사고가 났을 때 경찰이나 소방관 등을 도와주고 시민들을 구조하는 거죠. 유비 님의 능력은 여기에 아주 적합하겠죠? 물론, 이 임무도 사전 교육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그건 자신 있어!"
사람들을 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유비가 자주 하는 일이었다. 무엇인가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것은 염동력이란 능력을 가진 자의 특기 분야니까. 순간이동 능력 역시 구조에 아주 도움이 되리라. 마지막 능력도, 뭐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겠지.
비록 어렸을 적부터 계속 들어온 '능력을 숨기라'는 말 때문에 자주 쓰지 못해서 제대로 컨트롤하지는 못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의 말을 따르는 대신 차라리 계속 연습을 하는 게 나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컨트롤이 능숙했으면 이렇게 쉽게 히어로 본부에 들키지도 않았겠지. 왜 그가 자신이 히어로 본부에 발각되지 않길 바랐는지 지금 와서는 알 수 없지만 물을 수도 없었다. 이미 멀리 떠나버렸으니까. 뒤늦게라도 제가 여기 있는 걸 알게 되면 화를 낼까?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스승님. 이미 발각 됐고, 도망갈 수는 없는데. (히어로 기관이 강제는 아니지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들켰고, 유비의 이름까지 다 말해버렸으니 그들이 저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돈도 필요했다. 사람은 살아가야 할 것 아냐? 스승은 유비를 챙기면서도 금전에 대한 문제는 자급자족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유비는 늘 아르바이트 신세였고, 그러다가 강도를 만났고, 제압하는 도중에 서서를 만났으니 뭐. 발각된 것 자체가 스승의 때문이라고 덮어씌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유비는 기왕 본부에 들어가게 된 것, 스승의 생각과 당부 같은 건 저 멀리로 밀어놓고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히어로 본부의 정식 소속이 되면 꽤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에.
'군주 자리만 아니었으면 더 행복했을 텐데.'
그저 말단 영웅 중 한 명이었으면 더 편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살아온 주제에 냅다 한 쪽 진영의 군주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들으니 오는 부담이 장난 아니었다. 그 밑에 있을 쟁쟁한 영웅들을 생각하면 속이 조금 아프기까지 했다. 군주의 이름을 이어서 제 능력이 여러 가지란 말을 들었을 때는 '누린 게 있으니 갚아야 할 것도 있는 거구나.' 싶었지만. 다른 영웅들은 보통 하나의 능력만 갖고 있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일부러 히어로 기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서서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전부 신선한 소식들이었다.
"전대 유비님은 천리안을 갖고 계셨다고 해요. 덕분에 전대 삼군주 중에서는 최강이셨다고 하죠."
"아, 이름을 이었다고 해서 능력이 다 같은 건 아니구나?"
"그럼요. 사람이 다른데요. 지금 최강은 아마 조조님이실 거에요."
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사람은 어떤 능력이야?"
"불, 전기, 철이요."
"우와 대단해."
"말만 들어도 엄청나죠? 처음에 능력을 들었을 때 저희도 그랬어요. 이번 조조는 왜 이렇게 밸런스가 안 맞춰졌냐고. 그런 능력이 어떻게 개인한테 몰빵될 수 있냐고요. 불도 다루고, 전기도 다루고, 금속도 다루고. 듣기만 해도 얼마나 무서워요? 그 분이 나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정복할 수도 있겠다고, 그랬었죠 저희는."
"정말이네."
얼굴을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조조라는 사람이 무섭게 느껴진다. 그런 사람과 제가 같은 군주라고? 레벨이 맞기는 할까? 그가 오만하게 내려다보기라도 하면 전 아무것도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의 능력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아마 악으로 돌아서지는 않으실 거예요. 악은 무조건 처단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고... 다소 과격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건, 그 분이 악당이 되실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아요. 다행이죠."
"응, 다행이네."
그런 무서운 능력을 다 갖고 있는 사람이 철저한 정의의 편이라서.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책님도 대단하시긴 해요. 얼음, 전기, 신체랍니다. 전기 능력은 조조 님과 같으시고, 얼음은 상극이고, 신체적인 능력은- 몸이 아주 단단해지고 괴력을 보이는 능력을 말해요. 본부에 들어오기 전부터 무술을 하시던 분이라 능력과 합쳐지면 엄청 무섭죠. 제가 아까 최강이 조조님이라고 했는데, 사실 두 분이 대련하시면 거의 비슷비슷해요."
"응... 그럴 것 같아."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해보인다. 정말 자신이 그들과 같은 군주일 수 있을까? 그들과 같이 잘해나갈 수 있을까. 벌써부터 막막해졌다. 표정을 읽었는지 서서는 황급히 목소리 톤을 높이며 자신의 두 손을 꽉 쥐어보였다. 괜찮아요 유비님!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 것 같은 목소리였다.
"유비님은 능력이 두 가지 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염동력은 대단하시잖아요? 앞서 말씀드린 손책님과 조조님은 단점이 하나 있어요. 그 분들의 능력이 흑군주와 싸울 때는 압도적이지만 일상 업무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물론, 어떻게 활용을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유비님의 능력만큼 편리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응."
자신감을 갖든 안갖든 어차피 그 곳에 가기로 한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럼 너무 주눅든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굴러보자며 유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의 장점 중 하나였다.
3
"아래 애들하고는 잘 지내?"
"손책!"
다부진 손이 어깨동무를 걸어와 유비는 금방 상대를 알아보았다. 밝게 웃으며 대답하면 손책 역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유비가 본부 생활에 익숙해지게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성격 자체가 시원시원하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그냥 두고 가지 못하는 그는 유비와 닮은 면도 있었다. 그래서일지도 모르지, 좀 통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관우도 장비도 조운도 다 친절하고 모두 날 열심히 도와줘! 실수를 해도 혼내지 않고..."
그 부분에서는 말이 조금 기어 들어갔지만 손책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조조였다면 미간을 찌푸리며 아직도 실수를 하냐고 했겠지만, (유비는 그래도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조조가 저를 봐주는 것이란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군주를 혼낼 수 있는 아래 사람은 없어. 너는 그들의 군주야, 당당해지라고."
"그래도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지, 너 여기 온 지 아직 2주 밖에 안 됐잖아. 그 정도면 잘 하는 거야. 나도 처음 왔을 때 실수 왕창 했는 걸. 아직도 해. 다들 그러는 거지 뭐."
"응..."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를 격려하느라 이런 말을 해주는 건 고마워 유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계급 간의 상하 관계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관우나 장비가 다 친구 같기만 하지만, 그들을 책임지는 게 저라고 생각하면 어서 군주로서의 자각을 빠르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손책의 말대로.
"그러니까 실수했다고 뭐라고 하는 녀석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당당하게 쏘아줘."
"...그렇게 말하기가 좀 무서운 상대인데?"
"왜? 누군데? .....아, 설마."
"...."
"제갈량이구나?"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손책은 확신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엔 동시에 한 사람이 떠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곧 턱을 문지르며 '하긴, 거의 순둥이들만 가득한 촉 진영에서 실수했다고 주군을 쪼아 댈 만한 녀석은 한 놈밖에 없긴 하지. 그 놈은 나도 무서워.'하고 중얼거렸는데, 유비는 그 말에서 그 사람이 저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무서운 사람인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닐지를 고민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무척 잘생긴 미남 정도의 인상이었는데 이제는 마주쳐도 그의 미모가 눈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 꽃 같은 얼굴도, 잘 빠진 콧날도 이젠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다. 잘 갈아진 혀로 뱉어지는 말이 어찌 그리 가슴을 파던지. 떠올리니 절로 힘이 빠져서 유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그렇게 엉망인가 봐. 그래서 날 무지 싫어하는 것 같아."
어째서인지 제갈량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비를 싫어했다. 마치 유비를 싫어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다 싫어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거리를 두고 가까이 오려고 하지도 않더니 업무 상으로 같이 일을 해야 할 때는 최소한의 것만 말했고, 그가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그걸 가지고 칼 같이 문책을 한 뒤 사라졌다. 그쯤 되니 '날 싫어하는 건 아닐 거야, 내가 실수를 해서 그런 걸 거야.'란 최면을 건 유비도 알 건 다 알게 되어서, 제갈량이 절 정말로 안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악의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손책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다가 간신히 '음, 힘내.' 한 마디만을 던졌다.
"하지만 그 녀석이 널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긴 하지."
잠시 후 그가 어렵게 말을 뱉었다. 유비는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왜? 난 서서를 좋아하는 게 아닌데."
"어? 너 걔가 서서 좋아하는 거 알아?"
"그렇게 티가 나는데 모를 리가."
"그럼 서서보다는 낫군?"
손책이 킥 웃으며 유비를 잡아 끌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이야기하자는 것 같았다. 유비도 자동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고, 사실 누가 들어도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제갈량이 서서를 좋아한다는 걸 모를 사람이 이 본부에 있을 리가!- 남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 했다. 손책이 작게 귓속말 했다.
"티 정말 나지?"
"응."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티 났다. 제갈량을 무서워해서 그의 쪽을 잘 쳐다도 못보던 자신도 그의 짝사랑을 알 수 있을 정도니 정말 티가 났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무섭게 구는 사람이 서서의 앞에서만 봄날의 햇살처럼 사르르 녹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그걸 순전히 '우정'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서서가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다 알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한 적 있을 정도로.
"그래서 난 서서 옆에 가지도 않았어. 제갈량이 나 더 싫어할까 봐. 안 그래도 싫어하는데 서서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하게 되면 어떡해."
그저 싫어하는 상사인데도 이 정도인데, 연적까지 되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딴에는 무척 머리를 쓰고 눈치를 본 건데, 그의 말에 당연히 동의를 해 줘야 할 손책이 난처한 얼굴을 하니 유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책은 볼을 긁다가 천천히 유비를 돌아보았다.
"그게...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제갈량은 널 싫어할 이유가 있어."
"그게 뭔데?"
"음.. 내가 말해줘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이미 걔 짝사랑까지 알고 있으면 뭐.."
"뭔데? 말해줘. 알면 사이가 조금 더 좋아질 거 아냐."
"...안다고 해서 사이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뭐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 그래도 말은 해줄게. 당사자인 네가 모르면 답답할 테니까. 난 사실 걔가 널 미워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너도 알긴 알아야 할 것 같아."
뭔가 벌써부터 듣기 무서운 서두를 떼어 놓은 손책은 곧 주위를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대 유비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역대 제갈량이나."
"어?"
있을 리가 없다. 전대 유비가 천리안을 가진 것 정도밖에 모르는 걸. 유비가 눈을 깜박깜박 하고 있자 손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역대 유비와 제갈량들 말이야. 다 연인 사이였대."
"뭐?"
"전대 유비랑 전대 제갈량도, 전전대 유비랑 전전대 제갈량도 다 마찬가지.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다."
"....어.."
"그래서 걔가 그렇게 널 싫어하는 거야.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이름 만으로 자신과 엮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서서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걘 자기가 제갈량이고 네가 유비라는 것만으로도 싫어했을 걸. 뭔가에 매이는 거 엄청 싫어하는 것 같거든. 운명 같은 것도 안 믿고. 그러니.. 너랑 이름의 운명 같은 걸로 엮이는 것도 싫고, 서서가 오해할 수 있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볼 것도 싫어서 그러는 거겠지. 네가 그의 사랑에 방해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달까, 뭐 그런 거야."
"헐..."
전혀 몰랐다. 여기 와서 겪은 일 중 가장 최고의 쇼크였다. 대체 왜 아무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걸까. 정말 이건 제가 어떻게 고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안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란 손책의 말이 맞았다. 유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히어로 본부의 가장 로맨틱한 인연'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들은 충격을 감내해야 했다.
4
군주 유비가 제갈량의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제갈량, 넌 내 취향이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하게 될 일은 전혀 없을 거야! 내가 죽는 날까지 절대로! 내 이름에 걸고 맹세해!' 라고 외친 일이 본부 전체로 퍼지는 건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본 사람에 의하면 제갈량은 무척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그게 무슨 소리냐,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들은 거냐 따위를 물었지만 유비는 꿋꿋하게 자신과 그가 연인이 될 일은 없으니 저를 그만 미워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자신이 그간 유비에게 보였던 태도는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서가 아니며 오로지 공적인 일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유비가 그렇게 선을 긋고 난 뒤에 제갈량의 태도가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저번 대에는 연인이었을지 몰라도 이번 대에는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것. 이것이 당사자들에 의해 공표된 뒤 제갈량의 기분은 조금 더 좋아 보였던 것이다. 그래봤자 아주 미워하던 유비를 다른 사람과 같은 정도로 끌어 올렸음에 불과했지만 유비는 그 정도로도 만족한 것 같았다. 서서와 같이 있을 때면 (무척 잘해보라는 티를 내면서) 자리를 비켜주는 유비를, 제갈량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5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 그때 왜 그랬어."
"..."
제갈량은 말없이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평소라면 흐트러질 일이 없는 그였지만 지금 이 자리는 사적인 술자리였고,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어서 괜찮았다. 그냥 알다 뿐일까,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벌써 꽤 취했는지 얼굴이 붉어진 손책이 키득거렸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유비랑 네가 잘 될 것 같지는 않거든?"
"그래도...."
그래도 주군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결코 제갈량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하는 일은 없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제갈량은 고개를 들고 마른 세수를 했다. 그 때 그 맹세를 듣고 마음을 놓은 한심한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멍청아, 바보야, 넌 1년 뒤에 큰 후회를 하게 될 거야, 하고.
"그러게 왜 그랬어."
1년 만에 사랑에 빠지게 될 거였으면서 왜 그랬어. 손책이 히죽히죽 웃었지만 그를 타박할 마음도 나지 않았다. 젠장, 너무 성실하고 착실해서 자신이 한 모든 약속은 철저하게 지키는 군주 유비는 3년이 다 되어가도록 제 맹세를 깨뜨린 적이 없었다. 평생을 건 맹세를 쉽게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이렇게 얻게 되다니.
한 번 정도는 흔들릴 수 있을 텐데. 한 번 굳어진 첫인상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도 제갈량은 너무 잘 알게 되었다.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제갈량을 분류해버린 유비는 그 카테고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유비의 마음에는 닿지 않았다. 닿을 수가 없었다. 서서 때도 힘들긴 했지만 맹세라는 걸로 주위의 벽을 둘러놓은 유비는 차원이 달랐다.
"하여튼 넌 정말 널 좋아하지 않을 사람만 골라 좋아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전대 유비랑 제갈량이 연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낼름 잡아 쓸 것이지 그걸 그렇게 꼬아서 철벽을 세우게 만들다니, 네 팔자는 네가 꼬았어."
주유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화가 났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항의 같은 걸 할 수가 없었다. 짝사랑 2년 차, 군주 유비가 히어로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3년 차. 책사 제갈량은 하루하루를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 중이었다.
ㅇ>-< 초능력자물+제갈유비
생각나는 뒷내용이 있으면 아마 나중에 이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