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쬬윱] 사고는 갑자기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가 일어났을 때 다른 누군가의 침대 위에서 깨어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며 일어난다고 해도 그 드라마 속 주인공이 보이는 제스처-머리를 붙잡는다던지, 소리를 지른다던지-를 하지는 않을 거라고, 과장된 연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주인공의 심정을 절실히 깨닫게 된 유비는 그들이 미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뛰쳐나가 목을 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오버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을 때 유비가 본 것은 나신인 채로 누워있는 같은 학교의 선배 조조였다.
하필 상대도 조조라니 정말 죽고 싶었다. 유비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 그래도 아직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모르지 않나?'
같이 잠든 이 곳이 조조의 방인 것처럼 보이고, 두 사람이 나체로 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고 해서 꼭 둘이 잤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 법이다. (사실 이 상황에서 안 잤다는 이야기가 되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유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떤 다른 일이 있어서 옷을 벗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제가 술이 떡이 되어 조조가 이 곳에 저를 데려왔을지도 모른다고. 대체 언제부터 술자리에 조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학생회장이니 술자리에 불려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 부정 속에서도 '그 조조가 저를 부축하여 집에 데려온다'는 것은 너무 논리적인 어폐가 있는 말이라 기분은 점점 암울해져갔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제가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넌 선배들 싫어하는 거 알지만 이건 공짜 술이니 마시러 오라는 미축의 문자를 무시해버릴 텐데.
이제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빨리 옷을 입고 여길 뜨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 때쯤, 타이밍도 딱 알맞게 조조가 깨어났다. 머릿속에서는 망했다는 종이 울렸다. 이런 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 저도 눈을 뜨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는데, 조조가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할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차라리 그가 뭔가 일을 하도록 놔두자, 하고서 유비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패닉 상태라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되지 않는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이제 막 눈을 뜬 조조가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우습게도 조조가 처음 한 말은 이것이었다.
"깼어?"
아직 졸음기가 남았는지 잠겨있는 목소리였다. 평소에도 이 사람의 목소리가 좋다고 느끼긴 했으나, 이번 것은 이상하게 심장을 밑으로 툭 던져놓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평소의 형형한 눈동자도 지금은 몽롱하게 풀려있고, 머리도 부스스하게 뻗쳐 있다. 이렇게 무방비한 조조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역시 미남은 이런 상황에서도 잘 생긴 모양이다. 때문에 유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렸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조조가 이 뜻밖의 상황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최악의 상상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는 눈을 팽팽 돌리다 어렵게 물었다.
"저기,"
"어."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여기서 확인 사살을 당하면 못 버티고 어디 높은 곳에 가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인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이불을 꼭 쥔 채 묻자 유비를 바라보고서 고개를 갸우뚱한 조조는 여전히 잠겨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네가 내 옷에 토를 했지."
"아,"
미쳤어, 미쳤어!
조조의 태연한 말을 듣자마자 유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 그의 옷에 토를 하다니! 조조에게 트집잡힐 일은 절대로 하지 않던 제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학생회 임원이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 유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운 말로 포장을 한다 해도 조조와 유비는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유비가 입학했을 때부터 둘의 사이는 좋지가 않았다. 꿈을 가지고서 입학한 이 학과는 대학교인데도 군대처럼 딱딱해서 위계 질서 같은 것을 지키는 분위기였고, 조조는 그런 분위기의 주축을 이끌어나가는 학생회 임원 중 한 명이었다. 자유분방하게 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유비와 사사건건 부딪혔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조는 딱히 후배들의 군기를 잡으려 하진 않았지만 군기를 잡는 다른 선배들을 묵인했으니까. 유비가 보기에는 한통속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업계 좁으니 졸업하고 나서 회사에 들어가도 어차피 다 우리 얼굴을 보게 될 거다. 우리 말 들어라.' 하는 선배들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런 선배들을 가만히 참아주는 조조도 별로 곱게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참아준다'기엔 그냥 그들을 '없는 것처럼 무시한다'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유비는 조조가 미웠다.
그는 외모도 잘생긴데다가 성적도 좋고, 교수님들의 총애도 받고 있었으며 집안도 부자였다. 학과 행사에도 꾸준히 참석하여 못 하는 게 없는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사람을 대함에도 빈틈이 없어서 그는 그야 말로 '완벽한 인간'의 표본처럼 보였다. 덕분에 다른 선배들도 쉽게 대하지 못했으니, 만약 조조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선배들도 쓸데없는 군기 잡기니 뭐니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잡으려고 했다면 이상한 악습쯤은 없어질 수 있었다. 그냥 모두 자기 할 일만 하는 편한 학과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과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저와 상관 없는 것처럼 굴었고, 후배들에게도 관심이 없는 채 기계적으로 할 일만을 했다. 유비는 그의 그런 부분이 싫었다. 일부러 회의나 축제 때 조조를 살살 긁는 말을 던지기 시작한 건 그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무던히 넘기던 조조도 언젠가부터는 유비에게 날이 선 대응을 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둘은 장장 3년 동안 정적, 혹은 앙숙 비슷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적어도 유비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2학년 때부터 조조가 저 역시도 '무시'하는 대응을 펼치기 시작해 싸우는 일은 줄어들었고, 유비가 조조의 잘난 부분들은 인정하기 시작해서 치고박고 대놓고 싸우는 일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껄끄러운 사이. 흠 잡히고 싶지 않은 사이. 상대 앞에서는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은 사이였다. 그런데 옷에 토를 했다고? 부끄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즉시 얼굴을 굳힌 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를 가만히 보던 조조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갈아 입었으니까."
그렇다고 괜찮을 리가 없지. 이번 일은 명백히 제가 실수한 것이었다. 유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래서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안심이 되었다. 왜 그의 옷에 토를 했는데 제 옷까지 벗겨져 있는 줄은 몰라도, 어쨌든 안심이었다. 어제 있었던 '별 일'은 별 일이지만 제가 생각하고 있던 최악의 상황보다는 낫지 않은가. 덕분에 유비는 조금의 경계가 풀려 저도 모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전 또 저랑 선배가 자기라도 한 줄...."
아, 이 이야기는 선배의 앞에서 하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단어 선택이다. 그리 생각하고서 입을 다물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조조가 말했다.
"그것도 했고."
그 순간 방에는 긴 정적이 찾아왔다. 유비는,
정말 목을 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조조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은 이 자리를 떠나 딱딱한 벽에 머리를 박는 것이다. 어디 영화에 나오는 집요정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혹하게, 깨질 정도로.
하지만 핏기가 싹 사라진 채 할 말을 잃고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을 때 유비는 싸한 기분과 함께 불쾌한 감각을 느끼고야 말았다. 다리 사이로 뭔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찝찝한 느낌과, 허리와 허벅지 쪽의 통증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명백한 증거들이었으니까.
무심코 내려본 몸에는 울긋불긋한 붉은 점들이 가득했다. 일부러 보지 않았던 몸이 날려준 확인 사살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딱딱하게 멈춰선 유비를 느릿하게 훑은 조조가 애매한 미소를 띄고서 말했다.
"씻고 가."
그는 손가락으로 아마 방의 옆에 딸려있는 것 같은 욕실 쪽을 가리켰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못 보일 꼴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유비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조조가 그를 다루는 완벽한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럼 같이 씻든가."
툭 던져진 그의 말에 유비는 다시금 얼굴을 희게 물들이고, 혼자 씻겠다고 웅얼거리며 욕실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제 뒤에 따라붙는 조조의 시선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치고받고 싸우는 앙숙(유비 생각으로는) 이랑 자버린 유비. 그리고 이거 알오버스라서 임신까지 하게 되는데 그 부분까지는 못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