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쬬윱] 뒤집힌 1
오메가버스AU
"난 태오야."
"난... 유진."
아이들은 서먹한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이조차도 자의는 아니었다. 앞으로 친구처럼 지내면 좋겠다느니, 성격도 잘 맞을 거라느니 호들갑을 떨고 바람을 넣는 것은 주위에 서 있던 어른들이다. 그들은 이 두 꼬마가 곧 죽마고우라도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았다. 서로 죽고 못 살고, 떨어지지 않고 싶다고 때를 쓰는 단짝이라도 될 것처럼. 그래봤자 아는 것은 서로의 이름 뿐인데 말이다.
그래도 어린 아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뭐가 좋은지, 어른들의 어떤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어린애 특유의 눈치는 어른들이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했다.
"함께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그러니?"
말은 권유지만 속에 담긴 뜻은 명령과도 같았다. 하기 싫다고 하면, 혼은 내지 않겠지만 마냥 실망하는 눈길들이 돌아올 것이다. 어른들의 실망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어린 태오는 그 짐이 얹혀지기 전에 얼른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영악한 부모들은 자신들의 칭찬과 웃음이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착하고 의젓한 아이일수록 칭찬이 더 잘 먹힌다는 것도.
그 결과로 둘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극을 하듯 삐걱삐걱 걸음을 걸어 어른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시키는 대로 손을 잡고 정원으로 향한 것이다. 뒤에서는 마냥 흐뭇한 것처럼 들리는 웃음 소리가 났다.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했던 태오와 유진의 행동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었다.
어른들이 있는 곳과 한참 멀어진 장소에 도달했을 즈음에야 태오는 손을 놓았다. 긴장으로 축축해진 땀은 제 것인지 유진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은 태오가 손을 놓아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당연하리라. 좋아서 손을 잡은 건 아니니까. 어른들 앞에서 친한 척 한 건 성공이었으니 이쯤 와서는 놓아도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 어린이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꽤 난해한 문제였다.
지금 바로 돌아갈 순 없었다. 막 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30분은 있다가 돌아가야 부모님이 기뻐할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산책을 해? 어른들이 말한 '산책'은 두 사람이 이야기도 좀 하고 친해지라는 뜻이겠지만 아이들이 생각하는 산책은 정원이나 마당 따위를 돌아다니는 거였다. 한 마디로, 무척 재미없는 행위였다. 산책을 시켜줄 개도 없는데 늘 보는 정원 따위를 혼자 돌아 다녀봤자 재미도 없다. 때문에 태오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때우다가 가려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서 태오도 근처에 앉았다. 간간히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들 외에는 조용한, 침묵이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몇 살이야?"
그래서 유진은 입을 열었다. 어른들이 워낙 호들갑을 떨며 친해지라고 밀어준 게 쑥스럽고 머쓱해서 도리어 말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지, 눈앞의 이 남자애가 싫었던 건 아니었다. 원래의 유진은 오히려 낯을 잘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어른들이 어서 가서 말을 걸라고 떠밀지만 않았다면 언젠가 유진 스스로 먼저 태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을 것이다. 땅을 보고 있다 고개를 든 태오는 천천히 대답했다.
"12살."
"나보다 3살 많네."
"9살?"
"응."
"2학년이구나."
"응. 근데 우리 형은 6학년이야."
태오는 가만히 눈을 굴렸다. 가족 모임에서 유씨네 가족을 처음 본 게 아닌 만큼 제 또래의 남자애를 본 기억도 있었다. 유진보다 키가 좀 더 크고 나이가 든, 이름을 모르는 남자애. 그 앤 늘 유진과 붙어 있었다. 인사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쪽의 얼굴도 알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태오는 문득 궁금해진 걸 물었다.
"그런데 왜 안 왔어?"
"아빠한테 혼났어."
유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형이 아빠가 하지 말라던 걸 했거든. 집에서 벌을 받고 있는 중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이번 모임에는 유진만 온 거구나. 태오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도 그가 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건 사실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벌'이란 게 그냥 집에 얌전하게 있는 것 뿐이라면 태오도 그 벌을 받고 싶었다. 이런 자리에 나와봤자 예의바르게 행동하라는 말이나 친구 사귀라는 소리 같은 것만 들을 뿐 영 재미가 없었다. 같은 생각인지 유진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사실 나도 집에 있고 싶었는데."
"..."
"형을 두고 가니까 나도 두고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데려왔지 뭐야. 그래서 실망 중이었어. 알다시피 여긴 너무,"
"재미없으니까?"
"응."
처음으로 태오는 유진과 좀 통했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공감대 형성 말이다. 어른들이 바라는 효과가 그들에 대한 불만으로 생성되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유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그래도 이렇게 도망나와 있는 게 좀 더 재밌는 거 같아. 우리 저쪽에 늦게 가자."
"그래."
산책을 좀 오래했다고 하면 되지 뭐. 오히려 어른들은 기뻐할 것이다. 태오는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앉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
유진은 자기 형의 이름이 유장이라고 말했다. 내년에 중학교에 올라가는, 키가 크고 성질도 사납고 싸움도 잘하는 무서운 형이라고. 가끔 제가 장난을 칠 때는 무섭게 혼내지만 같이 놀 때는 재밌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알파로 판정이 되었다고도 했다. 형이 대단해서 다른 애들이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 좀 좋다고도 말했다.
태오는 제가 외동이라고 말했다. (아마 유진도 알고 있는 사실이리라. 그도 태오가 늘 혼자인 걸 알았을 테니까.) 그는 형이 있는 기분이 조금 궁금하다고 말했다. 데리고 있는 건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하나 뿐인데 나이가 많이 들어서 곧 하늘나라로 떠날 것 같다는 걱정도 말했다. 유진은 개를 함께 걱정해주었다. 그도 예전에 개를 키운 적이 있어서 할아버지 개를 걱정하는 기분을 안다고 했다. 태오는 그와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유진의 부모님은 아마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지만 늘 바빴다. 언젠가 나는 아빠가 할 일을 물려받게 된대. 태오가 말했다. 우리 집은 아마 형이 물려받을 거야. 유진이 말했다. 그럼 너는 무슨 일을 하는데? 태오가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할 수 있다면 나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아니면 뭔가 대단한 운동 선수. 유진이 말했다. 태오는 운동 선수가 되기에는 유진이 아직 작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형 유장은 키가 큰 편이었으니 유진도 나중에 더 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끝내었을 즈음, 두 사람의 귀에 부모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가야 하니 돌아오라는 소리였다. 어쩌면 태오가 기다려왔던 소리였으나, 일어나는 이 순간이 아쉽게 느껴졌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조금 더 남았는데. 태오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내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며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야기는 많이 했니?"
부모님은 그렇게 물었고,
"네."
태오는 거짓말 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있던 유진이 웃는 얼굴로 살짝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벌써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이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만났을 때 하렴. 자, 유진한테 안녕 인사해."
어머니는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른들끼리의 이야기가 잘 되었거나 혹은 제가 유진과 친해진 것이 정말로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직도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안녕해' 같은 말을 사용하는 건 좀 못마땅했지만 태오는 순순히 유진에게 인사했다. 유진도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 태오 형."
그가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에도 너희 형은 벌 받고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오기가 싫대."
태오의 옆에 앉으며 유진이 말했다. 그는 무언가 조심스러운 단어를 쓰려는 듯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말로는, 빠른 사춘기 같대. 원래 알파들은 사춘기에 그렇게 날카로워지고 ㄱ러나봐. 아빠가 그럼 너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면서 두고 왔어."
"흐음.."
태오도 사춘기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단어의 뜻만 알았다. 아직 겪어보지는 않았다. 가끔 부모님이 사춘기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얼굴을 찌뿌리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연히 저는 그 시기를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형질 판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집안 내력으로 유추해보자면 저도 아마 알파일 텐데, 그 난폭하다는 사춘기를 겪으면 부모님이 많이 고생하실 테니까.
유진이 목소리를 낮추자 더 위험하게 들리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가지 말라고, 같이 있자고 했는데 그냥 왔어."
"왜? 심심하잖아, 여기."
"응, 근데 내가 안 오면 태오 형 혼자잖아?"
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태오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모임이 유씨와 조씨 가족만 모이는 모임이 아닌 이상, 처음엔 다른 아이들도 많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아마 그 사춘기인가 뭔가 하는- 점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졌을 뿐이었다.
유장도 그런 시기를 거치고 있으니 유장을 따라 유진도 나오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아이는 태오 혼자였다. 정원으로 몰래 나와서 어른들의 따분한 이야기를 피해다니는 사람도 태오 혼자일 것이었다. 그것을 상상하자 숨이 막혀, 태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고마워."
"괜찮아."
유진이 명랑하게 말했다.
"난 어차피 사춘기 오려면 한참 멀었으니까, 그냥 계속 올 거야. 태오 형이 사춘기 걸려서 여기 안 나올 때까지."
"나는 사춘기 안 걸릴 건데."
"누구나 나이가 들면 다 걸린다고 했어. 그때가 되면 친했던 친구들도 다 귀찮아진대."
"난 안 그럴거야."
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유진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어깨를 으쓱했다.
"응, 알았어. 그럼 그 때가 되도 날 귀찮아 하면 안 돼? 모르는 척 하지도 말고, 싫어해서도 안 돼, 알았지?"
"그래."
태오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유진은 그와 새끼 손가락을 건 뒤 복사, 사인을 다 마치고 난 뒤에야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태오가 말해주었던 개의 안부에 대한 것이었다. 나날이 안 좋아지는 개의 건강 때문에 태오는 우울해했고, 유진은 성심껏 달래주었다.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면 나중에 주인이 올 때까지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유진의 말은 꽤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있잖아, 난 아마 오메가일 거야."
헤어지기 전 유진이 말했다. '집안 내력으로 보면 나는 아마 알파일 것'이라는 말을 유진에게 한 뒤에 부모님이 부른 거라, 정신이 팔려있던 태오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유장은 알파인데 유진은 오메가라니? 신기했지만 그런 집안도 있구나 생각하니 놀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남자 오메가나 여자 알파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구시대의 꼴통(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욕인 건 알았다) 쯤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당연히 알파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놀란 것 뿐, 그렇다고 유진에 대한 생각이 딱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유진은 오메가구나.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어른들이 어떤 생각으로 둘을 친하게 지내게 만들었는지, 약혼 관계가 두 개의 회사를 단단히 결속시키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따위는 아직 태오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레히삼 본편의 배틀로 만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