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대체 뭐지.’
유비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손을 묶은 수갑은 헐렁하여 금방이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두 손이 자유로워진다 해서 도망갈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구속한 사람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였으니까. 애초부터 본인이 포로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기에 수갑을 대충 묶은 것일 수도 있었다. 잡힌 이상 모험을 시도할 순 없었다.
유비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한 마을 쯤은 쉽게 멸망시킬 수 있는 사내였다. 누군가 반항하는 것을 참아주지 않는 냉담한 성격이기도 했다. 운이 좋아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유비 대신 다른 이들을 해치려 들겠지. 그의 자자한 악명을 생각하면 제가 도망치자고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유비는 숨을 죽인 채 최대한 얌전한 자세를 취하며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다만 남자 역시 조용한 건 조금 의외였다. 유비가 그를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으나, 마법사 제갈량하면 굳이 수소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쁜 소문이 자자했다. 마왕의 현신, 붉은 왕을 조종하는 본체. 악마이자 최악의 마법사. 이 세계를 깨부수려고 하는 사람, 세상의 온전한 멸망만이 목적인 사내. 애초에 유비가 이 세계로 불려온 것도 이 남자 때문이 아니던가. 평범하게 자신의 세계에서 잘 살고 있던 고등학생이 전혀 다른 세계에 떨어진 이유의 근원이 그였다. 처음 만났던 세계의 <신>, 사마휘가 그러지 않았는가. 붉은 왕의 뒤에 선 한 천재 마법사가 그의 힘을 조종하여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니 네가 꼭 막아야 하겠다고. 너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으니 원래의 세상에서 잠시 빌려온 것이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고 아무렇지 않게 그러마 했으나 세상에 툭 떨어져 관우와 장비, 조운 등을 만나고 서서라는 마법사를 패밀리어로 얻고 난 다음에는 유비도 슬슬 이 세계가 꿈이 아닌 진실이며, 자신이 아주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팔자에도 없는 용사 노릇이라니 황당하기가 짝이 없었다. 비록 제가 무술 도장 관장의 아들이며 온갖 무술을 갈고 닦아온 이력이 있다 해도 실전 전투 경험은 거의 없는 무지렁이인데 대체 이 세계는 어떤 기준으로 용사를 선택한 것일까. 되물어도 신은 ‘너만이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하곤 해서 유비를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곤 했다.
‘신이 널 선택한 거니까 나는 널 믿는다.’
조력자였던 푸른 왕은 그런 근거 없는 소리를 하며 어깨를 치기도 했지. 그는 너무 지나치게 긍정적이라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유비의 속을 터지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그래도 서서와 함께 유비가 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본디 이 세계는 ‘군주의 그릇’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며, 그에 따라 200년 동안 푸른 왕과 붉은 왕 두 사람이 통치해오고 있었다고 했다. ‘군주의 그릇’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은 마법사 한 명과 패밀리어로 엮여 힘을 더 강력하게 발휘하게 되며 푸른 왕 손책의 패밀리어는 주유였다. 붉은 왕 조조의 패밀리어는 사마의로 유비는 아마 그 자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원래 조조는 무척 정의로운 남자였어. 성격이 잘 맞지 않아 자주 싸우긴 했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었어. 우리가 주로 싸운 이유는 죄인을 처벌하는 방식 때문이었지. 나는 두 번째의 기회를 주려고 했고 녀석은 그러지 않아서 다툰 것이었을 뿐 선에 대한 추구는 우리 둘 다 같았어. 그런데 언제부터 녀석이 이상해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푸른 왕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제가 그렇게 싫어하던 악의 방식을 조금씩 닮아가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악을 싫어하는 마음이 과격해져서 그런 것일뿐이라고 여겼는데 점차로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생기고 혼란해져서, 세상을 유지시키려는 군주의 힘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정말 조조가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줄은. 생각해보니 그 즈음부터 사마의가 보이지 않던 것 같아. 마법사가 필요한 일은 다 제갈량이라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녀석이 다 하더라고. 그 녀석은 군주의 패밀리어도 아니면서 그 급으로 강한데다가 악랄하고 자비가 없는 녀석인데 내 생각에는 사마의의 부하가 아닐까 싶어. 유비 네 말대로라면 사마의가 조조를 조종해서 이상하게 된 걸까.’
씁쓸하게 과거를 추억하는 말을 듣고, 유비는 손책과 손을 잡아 붉은 왕의 마법사를 몰아내기로 했다. 손책의 말대로라면 조조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니 그를 혼란에 빠뜨리는 패밀리어만 처단하면 될 것이라고, 그러면 붉은 왕은 원래의 정의로운 왕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조종당하는 붉은 왕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방법은 세상의 반을 수호하고 있는 본인의 힘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온갖 억울한 죽음을 만들어내는 거였고 그 때문에 푸른 왕은 평소보다 더 강한 힘을 내야 했으며 유비는 부하들과 제 패밀리어와 함께 붉은 왕의 부하들과 싸워왔다. 용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점점 저에게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 불가능할 것 같던 목표를 하나 둘씩 이뤄가고, 마지막으로 그의 마법사를 처리하는 것까지는 힘들지만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홀로 남은 ‘용사를 죽이겠다.’며 날뛰는 붉은 왕을 진정시키려는 시도를 한 때까지도 좋았다. 계획이 틀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늘 가면을 쓰고 활동하던 유비의 얼굴이 공격에 의해 드러나 버렸다. 얼굴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곧 돌아가야 할 세상의 사람이기에 숨겼을 뿐인데 유비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붉은 왕 스스로가 눈을 크게 뜨고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유비와 동료들이 어리둥절하던 사이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왕의 눈에서는 믿기지 않게도 한 줄기 눈물이 천천히 흘러나왔고,
“역시 당신이었군요.”
남자의 입은 천천히 들썩이며 조조의 것이 아닌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비는 비로소 그가 누군가에 씌어있음을 알았다. 사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흑막은 사마의가 아니었다. 뒤로 펄쩍 물러나는 사이 조조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던 또 다른 남자, 신이 유비에게 말해주었던 바로 그 사람, 붉은 왕의 뒤에 서 있던 천재 마법사는 사마의가 아니었다.
그건 제갈량이었다.
손책과 다른 동료들이 놀라 반응하지도 못하는 사이 그는 유비를 낚아채 홀연히 사라졌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유비는 수갑을 찬 채 제갈량을 따라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도망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제갈량이 무서웠던 것도 있지만 유비 본인이 긴급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도 있었다. 치열한 마지막 전투로 붉은 왕은 결국 세뇌에서 풀렸고 멸망 계획은 일부 저지되었으니까. 이 세계가 곧바로 멸망으로 돌입할 일은 없는 것이다. 제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1차 계획은 완료된 셈이라 유비의 마음은 어느 정도 가벼웠다. 불안한 것은 그토록 이 세상을 없애고 싶어 하던 이 남자가 차분하다는 것뿐인데, 혼신을 쏟았던 세상 멸망 계획이 저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분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심지어 유비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채 데려가고 있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혹시 나를 제물로 바쳐서 세상을 한 큐에 멸망시킬 계획이 있다거나.’
생각해보진 못했지만 만약 그런 결말일 것이면 허무할 것 같았다. 붉은 왕까지 다 해치웠는데 결국 마지막 보스에서 실패했다는 거니까. 제가 죽는다는 것보다는 모두가 실망하고 아파할 게 더 슬펐다.
이 세계에 와서 지낸 지가 네 달이 넘어간다. 그러다보니 이젠 함께 지내던 동료들과도 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제가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한 걱정만 앞섰다면 이젠 제가 죽어도 좋으니 그들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갈량에게 무릎꿇고 빌기라도 할 것이다. 그가 특히 살리고 싶었던 건 패밀리어인 서서였다.
군주의 그릇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전사는 마법사와 패밀리어를 맺곤 한다. 서서는 본인이 마법사 중에서 덜떨어진 축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유비가 보기에 그녀는 대단한 마법사였다. 그 때문에 전사도 뭐도 아닌 제가 그녀의 짝이 된 게 미안했는데, 그래도 퍽 의지했다. 이런 상황이라도 그녀와 연결만 되었다면 마음이 한결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제갈량이 수를 쓴 탓인지 패밀리어끼리의 텔레파시를 나눌 수조차 없었다. 제가 없어진 지금 서서는 어떤 기분일까. 무사하긴 할까? 유비는 조금 우울해졌다.
“다 왔습니다.”
조금 뒤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외모만큼이나 단정한 목소리에 유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어주고 있었는데 이 역시도 퍽 낯선 태도였다. 역시 나를 제물 비슷한 걸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악랄한 흑의 마법사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도 남자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흰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는 성스럽다면 성스러웠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사제라고 해도 믿을 인상의 남자인데 대체 왜 세상의 모든 것을 그토록 증오하고 없애려고 했던 걸까. 나는 왜 여기로 데려온 걸까. 유비는 주춤거리며 그가 안내하는 대로 천천히 발을 들이밀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초록색과 하얀색으로 장식되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이상한 방-에 발을 디디는 순간 스스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누군가가 유비를 뒤에서 껴안았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군요. 드디어... 나의 왕이시여.”
유비는 놀라 파드득 떨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아예 다른 태도였다. 담담하고 감정 없는 목소리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눌러 담았던 노력에 의한 것인가. 남자의 목소리는 기이한 열망과 이해할 수 없는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신을 향해 열정적으로 고백하는 신도와도 같았다. 중얼중얼 거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 유비는 비로소 이 남자가, 손책의 말에 빌리면, <미치광이> 비슷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어쩐지 그를 곧장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남자가 억센 힘으로 껴안아 와서도, 목에 얼굴을 묻으며 입을 맞춰서도 아니었다. 그의 몸짓에서 어떠한 절박함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제가 그를 내치면 이 남자는 엄청난 상처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를 떨궈낼 수가 없었다. 우습기도 하지, 그는 세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려 시도했던 악랄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열이 옮았는지 얼굴이 화르륵 불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까지 했다. 아랫배가 살짝 간질간질한,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는데 이것이 제 것인지 그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겨우 제갈량이 사과하며 유비의 몸에서 얼굴을 떼어낸 뒤에야 유비는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갈량이 제 품에서 유비를 놓아주었다는 건 아니지만 목소리에서 더운 열기는 그럭저럭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유비는 조금 침착해졌다. 일단, 남자가 저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여 안심한 것도 있었다.
“놓아준다면 더 좋을 텐데.”
“그건 싫어요.”
칼 같은 거절이 돌아온 것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심지어 남자는 유비를 안은 채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그냥 서로 마주앉아 얼굴을 보면 좋을 텐데 왜 이런 불편한 자세를 고수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반항한다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유비는 잠자코 있었지만 제갈량은 그것으로 자세에 대한 다툼은 끝났다고 여긴 듯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희는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요. 유비, 나의 왕이시여. 나의 왕, 녹색의 군주, 유비. 나의 패밀리어인 당신을 다시 만나 저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쁩니다.”
목소리는 담담한 척 하지만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맞닿아있는 몸의 진동을 통해 전달되는 말을 들으며 유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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