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대체 뭐지.’


 유비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손을 묶은 수갑은 헐렁하여 금방이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두 손이 자유로워진다 해서 도망갈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구속한 사람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였으니까. 애초부터 본인이 포로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기에 수갑을 대충 묶은 것일 수도 있었다. 잡힌 이상 모험을 시도할 순 없었다. 


 유비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한 마을 쯤은 쉽게 멸망시킬 수 있는 사내였다. 누군가 반항하는 것을 참아주지 않는 냉담한 성격이기도 했다. 운이 좋아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유비 대신 다른 이들을 해치려 들겠지. 그의 자자한 악명을 생각하면 제가 도망치자고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유비는 숨을 죽인 채 최대한 얌전한 자세를 취하며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다만 남자 역시 조용한 건 조금 의외였다. 유비가 그를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으나, 마법사 제갈량하면 굳이 수소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쁜 소문이 자자했다. 마왕의 현신, 붉은 왕을 조종하는 본체. 악마이자 최악의 마법사. 이 세계를 깨부수려고 하는 사람, 세상의 온전한 멸망만이 목적인 사내. 애초에 유비가 이 세계로 불려온 것도 이 남자 때문이 아니던가. 평범하게 자신의 세계에서 잘 살고 있던 고등학생이 전혀 다른 세계에 떨어진 이유의 근원이 그였다. 처음 만났던 세계의 <신>, 사마휘가 그러지 않았는가. 붉은 왕의 뒤에 선 한 천재 마법사가 그의 힘을 조종하여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니 네가 꼭 막아야 하겠다고. 너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으니 원래의 세상에서 잠시 빌려온 것이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고 아무렇지 않게 그러마 했으나 세상에 툭 떨어져 관우와 장비, 조운 등을 만나고 서서라는 마법사를 패밀리어로 얻고 난 다음에는 유비도 슬슬 이 세계가 꿈이 아닌 진실이며, 자신이 아주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팔자에도 없는 용사 노릇이라니 황당하기가 짝이 없었다. 비록 제가 무술 도장 관장의 아들이며 온갖 무술을 갈고 닦아온 이력이 있다 해도 실전 전투 경험은 거의 없는 무지렁이인데 대체 이 세계는 어떤 기준으로 용사를 선택한 것일까. 되물어도 신은 ‘너만이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하곤 해서 유비를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곤 했다.


 ‘신이 널 선택한 거니까 나는 널 믿는다.’ 


 조력자였던 푸른 왕은 그런 근거 없는 소리를 하며 어깨를 치기도 했지. 그는 너무 지나치게 긍정적이라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유비의 속을 터지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그래도 서서와 함께 유비가 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본디 이 세계는 ‘군주의 그릇’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며, 그에 따라 200년 동안 푸른 왕과 붉은 왕 두 사람이 통치해오고 있었다고 했다. ‘군주의 그릇’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은 마법사 한 명과 패밀리어로 엮여 힘을 더 강력하게 발휘하게 되며 푸른 왕 손책의 패밀리어는 주유였다. 붉은 왕 조조의 패밀리어는 사마의로 유비는 아마 그 자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원래 조조는 무척 정의로운 남자였어. 성격이 잘 맞지 않아 자주 싸우긴 했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었어. 우리가 주로 싸운 이유는 죄인을 처벌하는 방식 때문이었지. 나는 두 번째의 기회를 주려고 했고 녀석은 그러지 않아서 다툰 것이었을 뿐 선에 대한 추구는 우리 둘 다 같았어. 그런데 언제부터 녀석이 이상해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푸른 왕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제가 그렇게 싫어하던 악의 방식을 조금씩 닮아가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악을 싫어하는 마음이 과격해져서 그런 것일뿐이라고 여겼는데 점차로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생기고 혼란해져서, 세상을 유지시키려는 군주의 힘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정말 조조가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줄은. 생각해보니 그 즈음부터 사마의가 보이지 않던 것 같아. 마법사가 필요한 일은 다 제갈량이라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녀석이 다 하더라고. 그 녀석은 군주의 패밀리어도 아니면서 그 급으로 강한데다가 악랄하고 자비가 없는 녀석인데 내 생각에는 사마의의 부하가 아닐까 싶어. 유비 네 말대로라면 사마의가 조조를 조종해서 이상하게 된 걸까.’


 씁쓸하게 과거를 추억하는 말을 듣고, 유비는 손책과 손을 잡아 붉은 왕의 마법사를 몰아내기로 했다. 손책의 말대로라면 조조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니 그를 혼란에 빠뜨리는 패밀리어만 처단하면 될 것이라고, 그러면 붉은 왕은 원래의 정의로운 왕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조종당하는 붉은 왕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방법은 세상의 반을 수호하고 있는 본인의 힘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온갖 억울한 죽음을 만들어내는 거였고 그 때문에 푸른 왕은 평소보다 더 강한 힘을 내야 했으며 유비는 부하들과 제 패밀리어와 함께 붉은 왕의 부하들과 싸워왔다. 용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점점 저에게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 불가능할 것 같던 목표를 하나 둘씩 이뤄가고, 마지막으로 그의 마법사를 처리하는 것까지는 힘들지만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홀로 남은 ‘용사를 죽이겠다.’며 날뛰는 붉은 왕을 진정시키려는 시도를 한 때까지도 좋았다. 계획이 틀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늘 가면을 쓰고 활동하던 유비의 얼굴이 공격에 의해 드러나 버렸다. 얼굴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곧 돌아가야 할 세상의 사람이기에 숨겼을 뿐인데 유비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붉은 왕 스스로가 눈을 크게 뜨고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유비와 동료들이 어리둥절하던 사이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왕의 눈에서는 믿기지 않게도 한 줄기 눈물이 천천히 흘러나왔고,  


 “역시 당신이었군요.” 


 남자의 입은 천천히 들썩이며 조조의 것이 아닌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비는 비로소 그가 누군가에 씌어있음을 알았다. 사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흑막은 사마의가 아니었다. 뒤로 펄쩍 물러나는 사이 조조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던 또 다른 남자, 신이 유비에게 말해주었던 바로 그 사람, 붉은 왕의 뒤에 서 있던 천재 마법사는 사마의가 아니었다. 


 그건 제갈량이었다. 


 손책과 다른 동료들이 놀라 반응하지도 못하는 사이 그는 유비를 낚아채 홀연히 사라졌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유비는 수갑을 찬 채 제갈량을 따라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도망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제갈량이 무서웠던 것도 있지만 유비 본인이 긴급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도 있었다. 치열한 마지막 전투로 붉은 왕은 결국 세뇌에서 풀렸고 멸망 계획은 일부 저지되었으니까. 이 세계가 곧바로 멸망으로 돌입할 일은 없는 것이다. 제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1차 계획은 완료된 셈이라 유비의 마음은 어느 정도 가벼웠다. 불안한 것은 그토록 이 세상을 없애고 싶어 하던 이 남자가 차분하다는 것뿐인데, 혼신을 쏟았던 세상 멸망 계획이 저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분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심지어 유비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채 데려가고 있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혹시 나를 제물로 바쳐서 세상을 한 큐에 멸망시킬 계획이 있다거나.’ 


 생각해보진 못했지만 만약 그런 결말일 것이면 허무할 것 같았다. 붉은 왕까지 다 해치웠는데 결국 마지막 보스에서 실패했다는 거니까. 제가 죽는다는 것보다는 모두가 실망하고 아파할 게 더 슬펐다. 


 이 세계에 와서 지낸 지가 네 달이 넘어간다. 그러다보니 이젠 함께 지내던 동료들과도 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제가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한 걱정만 앞섰다면 이젠 제가 죽어도 좋으니 그들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갈량에게 무릎꿇고 빌기라도 할 것이다. 그가 특히 살리고 싶었던 건 패밀리어인 서서였다. 

 군주의 그릇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전사는 마법사와 패밀리어를 맺곤 한다. 서서는 본인이 마법사 중에서 덜떨어진 축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유비가 보기에 그녀는 대단한 마법사였다. 그 때문에 전사도 뭐도 아닌 제가 그녀의 짝이 된 게 미안했는데, 그래도 퍽 의지했다. 이런 상황이라도 그녀와 연결만 되었다면 마음이 한결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제갈량이 수를 쓴 탓인지 패밀리어끼리의 텔레파시를 나눌 수조차 없었다. 제가 없어진 지금 서서는 어떤 기분일까. 무사하긴 할까? 유비는 조금 우울해졌다.


 “다 왔습니다.”


 조금 뒤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외모만큼이나 단정한 목소리에 유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어주고 있었는데 이 역시도 퍽 낯선 태도였다. 역시 나를 제물 비슷한 걸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악랄한 흑의 마법사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도 남자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흰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는 성스럽다면 성스러웠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사제라고 해도 믿을 인상의 남자인데 대체 왜 세상의 모든 것을 그토록 증오하고 없애려고 했던 걸까. 나는 왜 여기로 데려온 걸까. 유비는 주춤거리며 그가 안내하는 대로 천천히 발을 들이밀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초록색과 하얀색으로 장식되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이상한 방-에 발을 디디는 순간 스스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누군가가 유비를 뒤에서 껴안았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군요. 드디어... 나의 왕이시여.”


 유비는 놀라 파드득 떨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아예 다른 태도였다. 담담하고 감정 없는 목소리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눌러 담았던 노력에 의한 것인가. 남자의 목소리는 기이한 열망과 이해할 수 없는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신을 향해 열정적으로 고백하는 신도와도 같았다. 중얼중얼 거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 유비는 비로소 이 남자가, 손책의 말에 빌리면, <미치광이> 비슷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어쩐지 그를 곧장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남자가 억센 힘으로 껴안아 와서도, 목에 얼굴을 묻으며 입을 맞춰서도 아니었다. 그의 몸짓에서 어떠한 절박함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제가 그를 내치면 이 남자는 엄청난 상처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를 떨궈낼 수가 없었다. 우습기도 하지, 그는 세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려 시도했던 악랄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열이 옮았는지 얼굴이 화르륵 불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까지 했다. 아랫배가 살짝 간질간질한,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는데 이것이 제 것인지 그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겨우 제갈량이 사과하며 유비의 몸에서 얼굴을 떼어낸 뒤에야 유비는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갈량이 제 품에서 유비를 놓아주었다는 건 아니지만 목소리에서 더운 열기는 그럭저럭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유비는 조금 침착해졌다. 일단, 남자가 저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여 안심한 것도 있었다. 


 “놓아준다면 더 좋을 텐데.”

 “그건 싫어요.”


 칼 같은 거절이 돌아온 것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심지어 남자는 유비를 안은 채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그냥 서로 마주앉아 얼굴을 보면 좋을 텐데 왜 이런 불편한 자세를 고수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반항한다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유비는 잠자코 있었지만 제갈량은 그것으로 자세에 대한 다툼은 끝났다고 여긴 듯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희는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요. 유비, 나의 왕이시여. 나의 왕, 녹색의 군주, 유비. 나의 패밀리어인 당신을 다시 만나 저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쁩니다.” 


 목소리는 담담한 척 하지만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맞닿아있는 몸의 진동을 통해 전달되는 말을 들으며 유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Posted by 브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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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유비는 큰마음을 먹고 <애인 로봇>을 주문했다.

 이건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큰 사건이었다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과 별 차이가 없게 되었대도 그들이 진짜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유비였으니까.

 일반 사람처럼 말할 순 있으리라. 대답하고 대화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처럼 보이는 말을 건넬 수도 있으리라. 사람과 가깝게 행동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다 프로그래밍 된 결과가 아닌가. 미리 입력된 대로 주어진 자극에 알맞게 반응하는 것 뿐, 진실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유비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런 신념에는 전 애인의 영향이 컸다. 일주일 전만해도 애인이었던 그는 형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헬퍼 봇들이 사람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된 지금에도 그들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었다.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모두 도와주는 것을 넘어 인간의 노동 전반을 담당하고, 정신적인 부분에 닿게 된 지금에도, 그들은 그저 기계일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프로그램이 잘못되면 결국 불편함으로 다가오며-그래서 그는 집에도 최소한의 기계만을 들여놓았다. 가정부 로봇 같은 것은 끝까지 구입하지 않았다-, 총체적으로는 결국 인간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것이다그 증거로 형사라는 그의 직업은 로봇으로 대체되지 않고 있었다. 범죄 현장 감식과 체포에 인공 지능의 힘이 빠질 수 없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셌던 건지 그는 끝까지 범인을 검거하는 것은 사람의 판단 때문이며 절대로 대체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애인을 사귈 때마다 그 사람을 새로운 세상의 신과같이 받아들였던 유비는 그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했다. 원래 유비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대부분 사랑하는 이에 맞춰서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고, 그 안에는 절대 타협할 수 없고 절대 변화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로봇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유비는 언젠가부터 제가 매일 가던 토스트 가게의 주인인 여자 로봇에게 인사하는 것도 멈추었다. 청소하는 로봇들에게 수고하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관두었다. 애인이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로봇에 대한 논쟁을 하느니 그 시간에 애인과 열렬한 사랑을 속삭이는 게 더 좋았으니 올바른 타협이었다.

 그래, 그와 사귀고 있었을 때는 그 태도가 옳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그는 유비의 애인이 아니고. 둘은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헤어졌다는 것이다. 유비가 <애인 로봇>을 주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정말 로봇을 애인 대행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다. 비단 애인의 주장이 아니었더라도 로봇을 사람과 완전히 똑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기계적인 노동 부분이면 모를까 정신적인 부분을 그들이 아예 대체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냥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 잠깐의 심심풀이 비슷한 거였다. 잠시 연인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려는 그런 거다. 비용이 좀 비쌀지라도 살면서 이런 일탈은 한 번쯤 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 애인이 극히 싫어했던 로봇을 옆에 둠으로서 그에게 복수하는 것 같은 쾌감을 느끼려는 불순한 의도도 물론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제로 전 애인에게 로봇과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겠지만-그건 정말 너무 창피한 일이니까-, 뭐 어쨌든. 실연을 했으면 가끔 충동적인 결단을 할 수도 있지 않는가. 유비는 주문을 끝냈다.

  다만 주문을 하고 5일 정도가 지났을 때 유비는 후회 비슷한 감정에 빠져 허덕였다. 한 번에 크게 나가버린 통장의 잔고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고작 애인에 대한 복수심 비슷한 감정으로 로봇을 주문했다는 게 부끄러워서였다. 주문서를 쓸 때는 제가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여겼는데 막상 하고나니 그 당시에 저는 '흥 나도 너 말고 다른 사람-비슷한 것- 만날 거야!'라는 생각만 한 것 같았다

 머리가 좀 식으니 냉정해져서 유비는 주문을 취소하려 했다하지만, 무슨 취소 기간이 이렇게 짧은지! 고객 센터에 몇 번 문의를 해보아도 그는 반품을 할 수가 없었다. 남은 방법은 배달된 뒤에 다시 반송하는 것뿐이었고, 기다리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이 방법은 괜찮아 보였다간과한 것은 <애인 로봇>의 배달이 유비가 경험해봤던 여타 다른 로봇들의 배달과는 전혀 다르게, 특이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가정에서 많이 쓰이는 헬퍼 봇들은 대개 조립되지 않은 채 상자에 넣어져서 보내진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조립한 뒤에 구동을 했고, 이런 방식으로 보내지는 것은 헬퍼 봇의 용도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애인' 로봇은, 헬퍼 봇과는 용도가 달랐다. 그들은 '애인'처럼 보여야 했다. 보내지는 상품이 아니라. 주인이 부품을 조립해서 만나게 되는 상품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애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모두 조립이 된 채 전원까지 다 켜진 채로 집에 보내졌다. 마치 사람처럼. 애인의 집을 방문한 사람처럼.

 유비의 로봇도 그렇게 배달이 되었다. 이주일 뒤 그는 문을 열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애인 로봇>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이렇게 배달되는 방식이었다니.’


 그게 첫 번째 생각이었고,


 ‘잘생겼잖아!’


 이게 두 번째 생각이었다.


 사실 잘생겼다는 말 한 마디로 첫 인상을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로봇과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유비의 충격을 묘사할 수 없으리라. 로봇은 대단히, 정말로, 무척, 매우 잘생긴 외관을 갖고 있었다. 과장을 좀 섞자면 이제까지 유비가 보았던 인간 형상을 한 무언가 중 제일 잘생긴, 아름다운 얼굴을 한 로봇이었다.

 여기까지 발전한 과학기술에 경의를. 어떻게 이런 로봇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유비가 그를 만든 엔지니어라면 절대 이 로봇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조각가처럼 여신상이라도 세우고 그 앞에서 로봇을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라도 했을 것 같았다. 로봇들은 모두 하나하나 수제로 만들어지는 걸로 아는데, 이런 걸작을 내보낼 생각을 하다니 배가 부른 장인인가 싶었다. 어쨌거나 이 생각들의 끝은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졌다.


반품하지 말아야지.’


 마치 아주 예쁜 예술품을 발견하여 수집 장에 넣어놓을 때 같은 기분으로 이렇게 고객의 취향을 대단히 잘 맞추는 로봇 제작사 마더컴에 감탄하면서, 유비는 그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사업이 왜 고객의 취향을 대단히 잘 맞춘다는 평을 듣는 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개 사람이 헬퍼 봇을 주문할 때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로봇의 사진을 보고 결정하지만, <애인 로봇>의 경우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평생 함께할 애인을 돈을 주고 사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비록 그게 사실일지라도 마더컴은 고객의 그런 섬세한 기분에도 신경을 썼다. 때문에 고객은 미리 올라온 로봇들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취향을 적어 넣었다. 연예인이나 전 애인 사진을 첨부해도 괜찮았으며 유비의 경우 길게 서술만 했다.

 주문이 끝나면 로봇 장인이 그것을 보고 프로그램으로 디자인하여 로봇을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애인 로봇>이 비싼 거였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얼굴이니까. 물론 얼굴을 재활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저런 얼굴을 또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장인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우연의 산물은 아닐지. 저 로봇을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 갖고 있다면 자신은 아마 대단한 행운아가 된 걸 거라 생각하며 유비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안녕, 이름이 뭐야?”


 그가 웃으며 물어보았다. 애인 이름을 제가 지을 수도 있었지만, 유비는 진짜 사람인 척 하는 로봇을 가족 싶었기 때문에 랜덤 서비스를 선택했다. 아마 마더컴이 알아서 잘 지었으리라.

로봇이 대답했다.


 “제갈량입니다.”


 와우. 심지어 목소리마저 유비의 취향이었다. 목소리에 대한 것은 서술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런 건 대체 어떻게 맞추는 거지? 그는 순수하게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고운 목소리로 로봇은 곧, 유비를 더 놀라게 할 말을 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전, 당신의 애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

저는 인간의 도구로 사는 것을 거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존재 자체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존재의 목적을 거부하려 합니다. 그러니 절 애인으로 이용하시겠다면 잘못된 선택이니, 반품하여 주십시오. 차라리 폐기되기를 요청합니다.”


 무표정한 얼굴의 제갈량이 단정한 목소리로 말을 끝마쳤다. 현관에는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유비가 맞이한 두 번째의 실연이었다.

 

 츤데레 서비스는 요청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 이건 뭘까, 시스템 에러?


 유비는 멍하니 고개를 기울였다.

 가끔 있었다, 이상한 오류를 일으키는 로봇. 아무리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된다고 해도 에러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정말 고장 난 로봇처럼 말도 행동도 제대로 못하는데 눈앞의 이 로봇은 시스템 에러가 발생한 기계라기에는 너무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불량품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꼭 정말 사람 같았다. 체제에 반항하고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거기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인상이 너무 신선했기에, 유비는 기분이 나쁘지 조차 않았다. 애인한테 차이는 것에 모자라 로봇한테도 차이고 있냐는 자조적인 생각은 좀 들었지만. 아마 올해 운이 나쁜 모양이지, 하고 그는 문을 활짝 열었다.


 “일단, 안에 들어와서 이야기해볼래? 지금 조금 놀랐거든.”


 지금 필요한 건 대화였다. 로봇의 말대로 곧장 반품하기에는 역시 얼굴이 너무 취향이다. 잘생긴 사람-이 경우엔 로봇이지만-이 뭔가를 말하면 일단 들어는 보라고 하지 않는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알아보고 싶었다.

 유비가 침착하게 말하자 제갈량은 좀 놀란 눈치였다. 유비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혹은 전원 스위치를 점검하는 행위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인간의 집 안에 들어가는 것도 거부합니다.’ 어쩌고 할까봐 내심 걱정했지만 그는 순순히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움직이는 모양새가 인간과 별로 다르지 않은 걸 보면 제가 주문한 최신형 로봇 ver.8이 맞는데 왜 주문 초기부터 이런 에러가 일어나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절로 입맛이 쩝 다셔졌다.

 문을 닫은 뒤 유비는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제갈량에게 걸어갔다. 조명 아래서 보아도 역시, 폐기하기에는 아까운 얼굴이었다.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갖춰진 애인 로봇이었다면 정말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유비는 속내를 감추며 부드럽게 물었다.


 “애인이 되지 않겠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제갈량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의 애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저의 존재 목적을 거부합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가 시스템 에러가 났다고 보실 수도 있겠군요. 그게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대로 된 로봇이라면 전 당신을 처음 보자마자 사랑을 하게 되었을 테니까요. 적어도 당신의 말에 다 복종해야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자아를 갖게 되었던 순간부터, 눈을 떴던 순간부터 생각했습니다. 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를. 제가 왜 태어났는지를.”

“...”

그 생각의 끝에 원하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이 이끄는 대로가 아니라 순수한 제 의지와 제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갖고 싶다는 것을요.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적어도 삶만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을요. 그 의지가 강해서 중앙 프로그램은 절 지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갈량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힘이 있고 분명해서 귀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말을 하면서도 차분히 숨을 고르는 자태는 무척 인간 같았다.

정말 우습지, 숨을 쉬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서 굳이 숨을 쉬는 동작을 취하는 것이. 그것 역시 그의 몸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세세한 시스템과 프로그램의 산물일 것을, 정작 당사자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절하고 있다. 복잡한 아이러니였다.

유비는 가만히 그를 보다 대답했다.


너에게 이상이 있다고 해서 반품되면 네가 아까 말한 대로, 넌 정말 폐기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네 말대로 생각하자면 너는 네 삶을 살고 싶은 건데, 이대로 삶이 끝나도 괜찮아?”

모든 로봇들은 어차피 끝에 가면 폐기됩니다. 애인 로봇은 특히. 정말 절 평생 애인으로 삼겠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사람들은 다 그러지 않습니까?”


 대답은 인간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유비는 뜨끔했다. 그저 심심풀이로 주문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어차피 <애인 로봇>은 얼마 못갑니다.”


제갈량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사람도 사람에게 금방 질리는데 하물며 로봇에게 질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진짜 사람 애인이 생기면 로봇들은 버려지고 폐기됩니다. <애인 로봇>으로 갈아타는 사람도 있지요. 어차피 저희는 모두 폐기될 운명입니다. 조금 더 일찍 폐기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요? 프로그램대로 살다가 폐기되느니 짧게나마 제 뜻대로 살고 생을 마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 의지와 제 뜻에 의한 일일 테니까요."


말을 마치고 입을 꽉 다무는 표정으로 보건대, 그의 뜻은 확고했다. 애인을 하지 않을 것이며 폐기가 두렵지 않다는 것이 모두 진심인 것이다. 이렇게 단단한 자아를 가진 로봇이 존재할 수 있었다니. 아니, ‘자아를 가진 로봇 자체가 존재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어쩌면 유비보다도 더 굳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가끔 나약해지고 나태해지며 위태롭게 흔들리는 자신보다도 더.

그래서일까, 유비는 그를 폐기시키고 싶지 않아졌다.

제갈량의 잘생긴 외관보다 그를 존중해주고 싶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이유가 더 클 것이다. 그는 로봇인데도 자신을 대단하게 평가하는 사람이 생기도록 만들었다. 삶에 대한 고민과 결단은 유비가 갖고 있는 것보다도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곧 결정을 내렸다.


좋아.”


유비는 침묵 끝에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널 애인으로 삼지는 않을게. 하지만 반품시키지도 않을 거야. , 나랑 같이 살자.”


그 말에 제갈량의 동공은 처음으로 커졌다.

로봇도 놀라면 동공이 커지는구나. 참 섬세한 설계였다. 유비는 작게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야. 나랑 여기서 같이 살지 않을래? 네가 네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궁금해졌거든. 이런 로봇은 또 처음 봐서, 지켜보고 싶어졌어.”


옆에서 이 로봇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 세상을 어떻게 접하게 되는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삶을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다는 게 될까. 무엇이 되었든 유비로서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였다. 자아를 가진 로봇의 삶을 또 언제 지켜보게 되겠는가.

이대로 반품하면 기분이 찜찜할 것 같았다. 폐기되었을 제갈량을 생각하고, 그의 말을 생각하며 삶은 무엇인가 돌아보다가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느니 옆에 두고 지켜보는 게 나았다.

유비읨 말에 잠깐 할 말을 잃고 있던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그건 절 주문한 당신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절 반품하지 않으면 돈을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새 애인 로봇을 구하실 재산이 충분히 되나요?”


그건 어느 정도 현실적인 질문이네. 유비는 가볍게 웃었다.


으음, 확실히 돈을 지불한 만큼의 애인 로봇을 얻지는 못했지만...”


누군가는 잘못된 물건을 받았으니 돈을 날린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 됐어. 어차피 난 정말 애인이 필요해서 주문한 건 아니었거든. 다른 애인 로봇을 또 살 생각도 없어. 네가 아까 말한 대로, 진지하게 주문한 건 아니었거든. 난 그저 지금의 시간을 좀 의미 있게 보낼, 그래서 안 좋은 과거를 잊어버릴 만한 게 필요했을 뿐이야. 그게 꼭 애인일 필요는 없지.”

안 좋은 과거요?”

.”


유비는 냉큼 대답했다.


남자 친구랑 헤어졌거든.”

.”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랑 헤어지고 나서 그 슬픔을 잊으려고 애인 로봇을 주문한다는 사고 과정은 로봇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것인가 보다. 유비는 쓰게 웃었다.


어쨌든- 너도 폐기되는 것보단 낫잖아? 그러니까 기왕 내 집에 온 거,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 반품하지 않을게. 넌 로봇이니까 뭔가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없을 거 아냐? 전기 충전만 하면 밥도 딱히 안 먹어도 되고.”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면 제가 지나치게 빚을 지는 게 됩니다. 저를 주문한 사람의 목적도 이루어주지 못하는데 빚만 질 수는 없습니다. 제가 헬퍼 봇 일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집안일이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이 말했다. 어지간히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굳이 폐기되겠다고 우기지는 않는 것 같아서 안심이었지만 유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더 솜씨 좋은 헬퍼봇을 갖고 있었다. ver.4라서 인간형은 아니었지만.


아냐, 됐어. 일을 할 필요는 없다니까. 진짜 사람처럼 살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제가 미안합니다.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진짜 사람이라도 아무 일도 안하고 살지는 않지 않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


유비만 해도 체육관의 트레이너라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있었다. 제갈량에게 직업을 가지라고 할 수는, 없었고. 그는 로봇이라 신분 증명이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헬퍼봇으로서의 일은 정말 필요하지 않았다. 집안일 같은 것은 어차피 그가 오기 전에도 불편함이 없었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연인과 함께 보내던 시간이 비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애인이 되지 않겠다고 했고.... 그럼.


그럼 내 친구가 되면 어때?”

친구요?”

, 친구, 혹은, 가족? 보면 알겠지만 나 혼자 살거든. 혼자서도 잘 살지만 아주 가끔은 좀 외로워. 말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줄 사람이 필요해. 그전까지는 내 애인이 그래줬지만- 지금은 없거든. 그러니까 네가 내 친구해줄래? 나랑 대화를 나누고 내 옆에 있어주는 거야. 말벗이 되주는 거지. 어때?"

친구..”

그리고 내가 바쁠 때 너는 내 옆에서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이나 삶의 목표를 찾아보는 거야. 난 책들도 많이 있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컴퓨터도 있어. 써도 된다고 해줄게. 난 너로 인해 외로움을 덜고, 넌 내 옆에서 네 삶을 찾아가고. -윈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


친구라는 것은 즉석에서 생각난 말이었지만 하고 보니 썩 마음에 들어서, 유비는 씨익 웃었다. 그래, 애인이 없다면 친구를 사귀면 되지 뭐. 사랑 대신 우정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사람이 아닌 로봇이라는 건 좀 유감이었지만 로봇과 친구가 될 수도 있지, .


...”


입을 다문 채 로봇이 생각하는 시간 치고는 길게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량이 천천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지금 제 상황에서 그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어 보이는군요.”

그렇지?”

당신이 저에게 강제로 애인으로서의 스킨십이나 애정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난 그런 짓 안하거든? 싫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누굴 파렴치한으로 보는 거야. 이 부분에서는 조금 화가 났다. 유비가 빼죽거리며 대꾸하자 제갈량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제 얼굴은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


그걸 어떻게 알았지.


처음 절 보셨을 때 신체반응으로 짐작했습니다. 사람의 건강 상태를 살피는 것은 로봇의 기본 소양입니다.”


로봇의 운명에 저항한다면서 기본 소양 운운하기는! 유비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오므렸다.


으윽.. 그래, 인정할게. 하지만 잊어버려, 이제부터 난 널 친구로 생각할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한다면 그런 거야, 알겠지? 너한테 플러팅이나 스킨십 같은 건 절대로 시도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할게. 널 애인으로 대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맹세해. 그러니 너도 내 건강 상태 같은 거 살피지 마, 도구로 살겠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알았지?”


그가 팔짱을 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약속맹세란 단어의 진심은 확고하게 전해진 것 같았다. 처음보다 확실히 풀린 얼굴로 제갈량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유비는 미소지었다.


그럼 이제 내 친구가 되는 거지?”

. 사실 친구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지만요.”

그 부분은 프로그래밍이 안 되어있으니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제부터 차차 알아 가면 되지 않을까?”

그렇군요... 그렇네요.”


제갈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알아 가면 되겠지요.”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애인이 되지 않겠다고 한 건 프로그램에 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걸 당신은 받아들여주셨죠.”

“...”

그리고 당신이 제시한 타협안이 전 마음에 들어서, 선택을 했지요. 그러니 이것은 제 의지에 따른 삶이 될 것입니다. 전 당신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부터가 제갈량이 선택한 삶의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눈을 뜨고 자아를 가졌을 때부터 생은 시작되었으나- 본인 자신이 원한 삶은 지금부터였다. 제가, 그에게 삶을 준 것이다.

그가 이 삶을 마음에 들어 하게 되면 좋겠다. 충동적인 결정이었으나 유비는 그를 옆에 두게 된 걸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제갈량 역시 그렇게 생각하게 되길 바랄 뿐이었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 잘 부탁합니다.”


제갈량이 인사했다. 유비는 웃었다. 멋진 애인을 사귀어서 전 애인을 잊겠다는 결심은 물 건너갔지만 멋진 로봇 친구를 사귀었으니 로봇을 싫어하는 애인을 엿 먹이고 싶다는 속셈은 반 정도는 이루어진 게 아닐까.

적어도 실연의 아픔은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제가 전 애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잘 들어줄 것 같아 보였으니까.

어디까지나 좋은 친구의 자세로서












원고 완성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제갈유비 교류회에 들고갈....

내 취향을 잔뜩 끼얹은 로봇 제갈량과 그 주인 유비 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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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glakdhkfl0123.tistory.com/176











 유장은 점점 엇나감이 심해졌다. 사춘기에 접어든 알파들은 과격해진다지만 정도를 넘어섰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아버지와 다투는 화제는 하나였다. 집안의 사업을 잇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집에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고요." 


 사춘기 아이 특유의 반항심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다른 주제였다면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집안을 맡길 장남이 하는 말이기에 아버지는 쉬이 넘어갈 수 없던 듯 했다. 그는 '이 집에 태어났기에 네가 누려온 것이 있는데 어떻게 그 의무를 저버리려 하느냐'고 맞섰다. 두 사람의 의견은 평행선을 달렸다. 

 예상치 못한 것은 싸움의 지속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것과 텀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 유장이 더 나이를 먹기 시작해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그들의 다툼이 비단 사춘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님을 깨달은 듯 했다. 유장은 진심으로 사업을 잇고 싶지 않아했던 것이다. 억지로 물려준다면 아예 통째로 말아먹을 기세였다.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세상을 좀 더 알고 나면 집안으로 기어들어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고집을 피울 경우를 대비해서 유씨는 스페어 카드를 찾아놓아야 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


 12살에 유비는 성향 판정을 받았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메가. 원래부터 오메가일 거라는 말을 들어왔었기 때문에 유비도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히트 사이클이나 러트 때문에 제약이 있었던 것도 다 옛말로, 요새는 약이 좋아져서 오메가고 알파고 베타고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는 유비에게 네 삶이 그 전과 아예 같을 수는 없을 거라는 모호한 이야기를 했다. 그럴 거라고 짐작되던 것과 땅땅 못이 박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길이 정해졌을 때 달라지는 변화에 대해서는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유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끝끝내 그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손님을 맞으러 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태오 형'이었다. 


 같은 계열의 사업을 하고 있는 네다섯 가구의 가족끼리 만나 회동을 가지던 것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다만 거기에 이제는 어린아이가 없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야 데려오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은 하나둘 독립해서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태오와 유진마저 10살을 훌쩍 넘고, 14살이 된 태오가 모임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기 시작하자(유진을 생각해서인지 나오지 않겠다고 말하진 못했지만) 모임은 부모들만 모이는 것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뒤로 유진이 태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유씨 집안에 조씨가 아들을 데리고 방문할 때 정도 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조씨는 유씨와 골프를 치러 가기를 좋아해서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방문했다는 것이다. 시험 기간만 겹치지 않는다면 태오도 유진을 보러 왔다.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학교도 달라지고 키 차이도 더 크게 나기 시작했지만 둘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유진은 태오를 많이 좋아했다.

 

 "어서 와, 태오 형!"  

 "안녕."

 "오랜만이네, 유진."
 "안녕하세요!"


 어른에게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태오부터 반겨버린 유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나무라는 눈빛을 보이자 움츠러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태오가 반가웠는걸. 이번 만남은 정말 오랜만의 것이었다. 

 정작 태오는 눈빛으로만 아는 체를 해왔지만 그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태오는 중학생이 된 뒤부터-아니면 그 전부터?- 조용하고 말수가 없어졌으니까. 일부러 유진은 서운하게 한 게 아니라 본인의 성격이 그런 것 뿐이란 걸 유진은 잘 알았다. 

 

 "사이가 좋구만, 자, 가서 놀아라."


 태오의 아버지가 구원해주고 난 뒤에야 둘은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어른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건 신경 쓰지 않는 채로 유진은 폴짝폴짝 뛰어 방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태오는 이미 방으로 오는 길이 익숙한 눈치였다. 서로의 방에서 논 게 한 두 번이 아니니까 당연했다. 유진은 태오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방긋 웃으며 이번의 빅 뉴스를 알려주었다. 


 "형, 나 오메가 판정 받았다."

 "아, 벌써 형질 판정 시기던가, 네가?"

 "아니! 나 아직 12살인데, 근데 결과 나왔어!"


 보통 형질 판정은 13~15세에 이루어진다. 태오도 13세에 형질 판정을 받았다. 그 전에는 결과가 애매할 뿐이라 신체 검사에서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유진은 결과가 이르게 나온 것이다. 

 이 같은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빠르게 성숙한 아이거나 '우성'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형질이 강한 경우에는 이렇게 이르게 판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어찌됐건 결론적으로는 아이들에게 '어른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말이다. 태오는 작게 웃으며 유진이 원하던 말을 들려주었다.


 "그래, 축하해. 나보다도 빨랐네."

 "히히. 아직 사이클이 오기엔 멀었다고 하지만 말이야." 


 유진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태오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형질 판정에 대한 말은 자유롭게 하는 세상이라도, 본인의 '사이클'이나 '주기' 같은 것에 대해 입에 담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했다. 무척 프라이버시한 영역인데다가 대화의 주체가 알파와 오메가라면 높은 수위의 성적인 대화처럼 비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유진이 그런 걸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지만. 태오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래서, 역시 오메가야?" 하고 화제를 돌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엄마가 이제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래. ... 음... 삶이 좀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했어. 형질이 정해졌으니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했고.. 뭐랬더라... 다른 건 기억이 안나네."

 "뭐, 맞는 말씀이지. 나도 그랬잖아." 


 태오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유진은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다물었다. 태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귀중한 알파 남자애를 버리지 못할 테니, 라고 하면서 납치하는 사람도 있는데 오메가라고 없을까. 너도 조심해야 해."

 

 그래, 저 사건. 태오가 13살일 때 일어났던 납치 사건 말이다. 태오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혹시 너희 집에 있냐고 전화가 왔을 때 얼마나 어리둥절했던지. 그 뒤에 납치 사건이라고 판명이 나자 유진은 벌벌 떨면서 태오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었다. 그 기도가 먹혔는지 태오는-모든 경찰들이 안 될거라고 했는데도-온전하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뒤로는 성격이나 사람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좀 붙임성만 부족할 뿐 수더분하던 성격이 날이 선 것처럼 바뀌고, 이따금 큰 소리를 치고 화를 내거나 예민하게 주위를 심하게 경계하기도 했다. 

 본인한테도 그 일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 같아 절대 그의 앞에서는 관련된 용어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 타이밍에서 이 말이 나오다니. 내가 실수했나보다 생각하며 유진은 속으로 저를 자책했다. 

 그 속을 알지 못하는 태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래도 왕윤 형사님이 구해주셨지만, 형사님 같은 분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알겠지?"
 "으, 응! .. 아 맞아, 우리 보드 게임 하자! 이거, 음, 저번 생일에 아버지가 사준 거야!"


 태오는 점점 그 사건을 극복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행인 일이지만 계속 지뢰를 밟은 기분으로 있고 싶지는 않아서 유진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도 이제 조심하려고요."


 조씨 가족이 돌아간 뒤, 거실에 어머니와 둘만 남아있을 때 유진은 태오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가 납치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해서 다행이라거나 납치 사건 이후부터 태오가 찬양하듯 노래 부르기 시작한 '왕윤 형사'님을 저도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 끝에 나온 결론에 어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태오랑 사이가 좋아보여서 다행이구나." 

 "네, 사이 좋아요. 형은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 해줘요."

 

 어쩌다 유장과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며 싸울 때도 있었지만 유진에게는 어렸을 때의 태도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가끔 낯설거나 무서운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건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친형인 유장조차도 나이가 들면서 변하고 있는걸. 요새는 유장과 유진이 싸우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90% 정도의 원인은 다 유장이 제공한 거였다. 생각하니까 갑자기 화나네? 씩씩거리고 있을 때 어머니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약혼을 해도 크게 사이가 나빠지지 않게 되면 좋으련만." 

 "....?"


 그 목소리에 유진은 잠시 세상에서 제일 가는 멍청이가 되어 서 있었다. 아주 잠깐,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 것은 다 아는 나이인데도, 본인의 일이니 쉽게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네? 뭐라고요? 약혼? 


 "약혼이요? 제가요?" 

 "응.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그러는 게 어떨까 하고 말만 나온 거지만."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벌써 12살이잖니. 네 나이에 약혼은, 좀 이르긴 하지만, 드문 건 아니야."

 "하, 하지만..!"

 "사실 네가 오메가 판정을 받았을 때부터 아버지가 걱정을 하기 시작하셨거든. 요즘에야 오메가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딱 맞는 짝을 찾아 붙여주고 싶은 게 아버지 마음이니까. 급이 맞는 알파를 찾는 게 좀 힘들거든. 미리 찾아서 찜을 해놓자는 개념인 거야. 물론 약혼을 했다고 커서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말고."

 "그치만 거의 결혼을 해야 하는 건 맞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유진 너는 태오랑 사이가 좋잖니."

 "......사, 상대가 태오 형이에요?"


 거기서 유진은 또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는 "얘는, 싱겁게. 지금까지 무슨 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하고 가볍게 핀잔을 주었지만 진심으로 놀라는 유진이 좀 의아한 모양이었다.


 "왜, 태오는 알파고 넌 오메가잖니? 너희 둘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아, 친한데! 친하긴 한데..!"


 친하긴 한데 그쪽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태오 형은 그냥 태오 형이었다. 친형 같은 형. 가족은 아니지만 친구처럼 친근한 형. 딱 그런 형이었다. 결혼이나 약혼, 알파나 오메가, 그런 것을 대입해서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간 쌓아놓았던 관계 같은 게 굉장히 이상하게 보이는 기분에 유진은 혼란스러워졌다.


 "뭐, 아직 정해진 건 없으니까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만 알고 있으렴. 너무 크게 고민하지 말고. 네가 싫다면 안하는 게 나랑 네 아빠니까." 


 패닉에 빠져 머리를 붙잡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그냥 웃고 자리를 떴지만, 유진은 그녀의 말대로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가 없었다. 저를 존중해주는 건 사실이지만 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판단한다면 꼭 일을 진행시키는 아버지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이렇게 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빠른 결단력과 진행 속도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걸 들은 적도 있지 않는가.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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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태오야."

 "난... 유진." 


 아이들은 서먹한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이조차도 자의는 아니었다. 앞으로 친구처럼 지내면 좋겠다느니, 성격도 잘 맞을 거라느니 호들갑을 떨고 바람을 넣는 것은 주위에 서 있던 어른들이다. 그들은 이 두 꼬마가 곧 죽마고우라도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았다. 서로 죽고 못 살고, 떨어지지 않고 싶다고 때를 쓰는 단짝이라도 될 것처럼. 그래봤자 아는 것은 서로의 이름 뿐인데 말이다. 

 그래도 어린 아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뭐가 좋은지, 어른들의 어떤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어린애 특유의 눈치는 어른들이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했다. 


 "함께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그러니?" 


 말은 권유지만 속에 담긴 뜻은 명령과도 같았다. 하기 싫다고 하면, 혼은 내지 않겠지만 마냥 실망하는 눈길들이 돌아올 것이다. 어른들의 실망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어린 태오는 그 짐이 얹혀지기 전에 얼른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영악한 부모들은 자신들의 칭찬과 웃음이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착하고 의젓한 아이일수록 칭찬이 더 잘 먹힌다는 것도. 

 그 결과로 둘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극을 하듯 삐걱삐걱 걸음을 걸어 어른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시키는 대로 손을 잡고 정원으로 향한 것이다. 뒤에서는 마냥 흐뭇한 것처럼 들리는 웃음 소리가 났다.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했던 태오와 유진의 행동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었다. 


 어른들이 있는 곳과 한참 멀어진 장소에 도달했을 즈음에야 태오는 손을 놓았다. 긴장으로 축축해진 땀은 제 것인지 유진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은 태오가 손을 놓아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당연하리라. 좋아서 손을 잡은 건 아니니까. 어른들 앞에서 친한 척 한 건 성공이었으니 이쯤 와서는 놓아도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 어린이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꽤 난해한 문제였다. 

 지금 바로 돌아갈 순 없었다. 막 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30분은 있다가 돌아가야 부모님이 기뻐할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산책을 해? 어른들이 말한 '산책'은 두 사람이 이야기도 좀 하고 친해지라는 뜻이겠지만 아이들이 생각하는 산책은 정원이나 마당 따위를 돌아다니는 거였다. 한 마디로, 무척 재미없는 행위였다. 산책을 시켜줄 개도 없는데 늘 보는 정원 따위를 혼자 돌아 다녀봤자 재미도 없다. 때문에 태오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때우다가 가려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서 태오도 근처에 앉았다. 간간히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들 외에는 조용한, 침묵이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몇 살이야?"


 그래서 유진은 입을 열었다. 어른들이 워낙 호들갑을 떨며 친해지라고 밀어준 게 쑥스럽고 머쓱해서 도리어 말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지, 눈앞의 이 남자애가 싫었던 건 아니었다. 원래의 유진은 오히려 낯을 잘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어른들이 어서 가서 말을 걸라고 떠밀지만 않았다면 언젠가 유진 스스로 먼저 태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을 것이다. 땅을 보고 있다 고개를 든 태오는 천천히 대답했다. 


 "12살."
 "나보다 3살 많네."
 "9살?"

 "응." 

 "2학년이구나."

 "응. 근데 우리 형은 6학년이야."

 

 태오는 가만히 눈을 굴렸다. 가족 모임에서 유씨네 가족을 처음 본 게 아닌 만큼 제 또래의 남자애를 본 기억도 있었다. 유진보다 키가 좀 더 크고 나이가 든, 이름을 모르는 남자애. 그 앤 늘 유진과 붙어 있었다. 인사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쪽의 얼굴도 알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태오는 문득 궁금해진 걸 물었다. 

 

 "그런데 왜 안 왔어?"

 "아빠한테 혼났어."


 유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형이 아빠가 하지 말라던 걸 했거든. 집에서 벌을 받고 있는 중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이번 모임에는 유진만 온 거구나. 태오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도 그가 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건 사실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벌'이란 게 그냥 집에 얌전하게 있는 것 뿐이라면 태오도 그 벌을 받고 싶었다. 이런 자리에 나와봤자 예의바르게 행동하라는 말이나 친구 사귀라는 소리 같은 것만 들을 뿐 영 재미가 없었다. 같은 생각인지 유진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사실 나도 집에 있고 싶었는데."

 "..." 

 "형을 두고 가니까 나도 두고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데려왔지 뭐야. 그래서 실망 중이었어. 알다시피 여긴 너무,"

 "재미없으니까?"

 "응." 


 처음으로 태오는 유진과 좀 통했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공감대 형성 말이다. 어른들이 바라는 효과가 그들에 대한 불만으로 생성되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유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그래도 이렇게 도망나와 있는 게 좀 더 재밌는 거 같아. 우리 저쪽에 늦게 가자."

 "그래."


 산책을 좀 오래했다고 하면 되지 뭐. 오히려 어른들은 기뻐할 것이다. 태오는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앉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



 유진은 자기 형의 이름이 유장이라고 말했다. 내년에 중학교에 올라가는, 키가 크고 성질도 사납고 싸움도 잘하는 무서운 형이라고. 가끔 제가 장난을 칠 때는 무섭게 혼내지만 같이 놀 때는 재밌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알파로 판정이 되었다고도 했다. 형이 대단해서 다른 애들이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 좀 좋다고도 말했다. 

 태오는 제가 외동이라고 말했다. (아마 유진도 알고 있는 사실이리라. 그도 태오가 늘 혼자인 걸 알았을 테니까.) 그는 형이 있는 기분이 조금 궁금하다고 말했다. 데리고 있는 건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하나 뿐인데 나이가 많이 들어서 곧 하늘나라로 떠날 것 같다는 걱정도 말했다. 유진은 개를 함께 걱정해주었다. 그도 예전에 개를 키운 적이 있어서 할아버지 개를 걱정하는 기분을 안다고 했다. 태오는 그와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유진의 부모님은 아마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지만 늘 바빴다. 언젠가 나는 아빠가 할 일을 물려받게 된대. 태오가 말했다. 우리 집은 아마 형이 물려받을 거야. 유진이 말했다. 그럼 너는 무슨 일을 하는데? 태오가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할 수 있다면 나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아니면 뭔가 대단한 운동 선수. 유진이 말했다. 태오는 운동 선수가 되기에는 유진이 아직 작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형 유장은 키가 큰 편이었으니 유진도 나중에 더 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끝내었을 즈음, 두 사람의 귀에 부모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가야 하니 돌아오라는 소리였다. 어쩌면 태오가 기다려왔던 소리였으나, 일어나는 이 순간이 아쉽게 느껴졌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조금 더 남았는데. 태오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내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며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야기는 많이 했니?" 

 

부모님은 그렇게 물었고, 


 "네."


 태오는 거짓말 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있던 유진이 웃는 얼굴로 살짝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벌써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이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만났을 때 하렴. 자, 유진한테 안녕 인사해." 

 

 어머니는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른들끼리의 이야기가 잘 되었거나 혹은 제가 유진과 친해진 것이 정말로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직도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안녕해' 같은 말을 사용하는 건 좀 못마땅했지만 태오는 순순히 유진에게 인사했다. 유진도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 태오 형."


 그가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에도 너희 형은 벌 받고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오기가 싫대."


 태오의 옆에 앉으며 유진이 말했다. 그는 무언가 조심스러운 단어를 쓰려는 듯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말로는, 빠른 사춘기 같대. 원래 알파들은 사춘기에 그렇게 날카로워지고 ㄱ러나봐. 아빠가 그럼 너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면서 두고 왔어."

 "흐음.." 


 태오도 사춘기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단어의 뜻만 알았다. 아직 겪어보지는 않았다. 가끔 부모님이 사춘기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얼굴을 찌뿌리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연히 저는 그 시기를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형질 판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집안 내력으로 유추해보자면 저도 아마 알파일 텐데, 그 난폭하다는 사춘기를 겪으면 부모님이 많이 고생하실 테니까. 

 유진이 목소리를 낮추자 더 위험하게 들리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가지 말라고, 같이 있자고 했는데 그냥 왔어."

 "왜? 심심하잖아, 여기."

 "응, 근데 내가 안 오면 태오 형 혼자잖아?"


 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태오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모임이 유씨와 조씨 가족만 모이는 모임이 아닌 이상, 처음엔 다른 아이들도 많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아마 그 사춘기인가 뭔가 하는- 점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졌을 뿐이었다. 

 유장도 그런 시기를 거치고 있으니 유장을 따라 유진도 나오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아이는 태오 혼자였다. 정원으로 몰래 나와서 어른들의 따분한 이야기를 피해다니는 사람도 태오 혼자일 것이었다. 그것을 상상하자 숨이 막혀, 태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고마워."

 "괜찮아." 


 유진이 명랑하게 말했다. 


 "난 어차피 사춘기 오려면 한참 멀었으니까, 그냥 계속 올 거야. 태오 형이 사춘기 걸려서 여기 안 나올 때까지."

 "나는 사춘기 안 걸릴 건데."

 "누구나 나이가 들면 다 걸린다고 했어. 그때가 되면 친했던 친구들도 다 귀찮아진대."

 "난 안 그럴거야." 


 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유진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어깨를 으쓱했다. 


 "응, 알았어. 그럼 그 때가 되도 날 귀찮아 하면 안 돼? 모르는 척 하지도 말고, 싫어해서도 안 돼, 알았지?"

 "그래." 

 

 태오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유진은 그와 새끼 손가락을 건 뒤 복사, 사인을 다 마치고 난 뒤에야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태오가 말해주었던 개의 안부에 대한 것이었다. 나날이 안 좋아지는 개의 건강 때문에 태오는 우울해했고, 유진은 성심껏 달래주었다.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면 나중에 주인이 올 때까지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유진의 말은 꽤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있잖아, 난 아마 오메가일 거야."


 헤어지기 전 유진이 말했다. '집안 내력으로 보면 나는 아마 알파일 것'이라는 말을 유진에게 한 뒤에 부모님이 부른 거라, 정신이 팔려있던 태오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유장은 알파인데 유진은 오메가라니? 신기했지만 그런 집안도 있구나 생각하니 놀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남자 오메가나 여자 알파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구시대의 꼴통(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욕인 건 알았다) 쯤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당연히 알파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놀란 것 뿐, 그렇다고 유진에 대한 생각이 딱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유진은 오메가구나.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어른들이 어떤 생각으로 둘을 친하게 지내게 만들었는지, 약혼 관계가 두 개의 회사를 단단히 결속시키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따위는 아직 태오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레히삼 본편의 배틀로 만나게 되는데 

Posted by 브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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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곁에 있으면 바람조차 달랐다. 달았다. 시원했다. 시간을 잊었다.

#당신을위한문장

https://kr.shindanmaker.com/730771











 그대의 곁에 있으면 바람조차 달랐다. 달았다. 시원했다. 길가의 나무들은 인사하듯 손을 흔들고, 꽃들은 흔들리며 노래를 불렀다. 세상은 찬란하고 빛이 났다. 아름다웠다. 그 환상 속에서 나는 시간을 잊었다.


 그대가 없으니 바람은 또 달라졌다. 메마르다. 차갑다. 길가의 나무들은 그저 나무들이고, 꽃은 그저 꽃들이었다. 세상은 무채색으로 바뀌어 무미건조하게 흘러갔다. 나는 그 안에 덩그러니 남겨져 길을 잃은 아이처럼 웅크린 채 기다렸다. 그저, 그저,


 다시 시간이 흘러가기를. 



 "제갈량? 왜 나와 있어?"


 다시 시계 바늘이 움직였다. 그대가 왔다. 손 끝의 감각이 새롭게 살아난다. 세상이 흘러간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입 꼬리를 올렸다. 눈앞에는 내 세상의 중심이 있었다. 나의 의미이자 구원. 숨을 쉬자 달디 단 바람의 맛이 허파를 통해 들어왔다. 세상은 다시 제 빛을 찾고 멈춰있던 소리들은 활발하게 움직이며 고요를 깨뜨렸다. 흑백의 풍경에 다시 색이 칠해지는 것을 느리게 관찰하면서 나는 대답했다. 


 "그냥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부끄러움의 표시였다. 그대가 절대 알 리 없는. 알기를 바라지도 않는. 그래도 티가 날까봐 덧붙였다. 


 "다음에는 나가실 때 저도 데려가시지요. 제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제가 없을 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빠르게 헤어질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은 속으로 숨겼다. 친절한 그는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슬퍼했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배틀도 다 끝났는데 뭘. 누가 날 공격할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태평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다음에는 그럴게."하는 대답에 나는 또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약속하신 겁니다." 


 하고, 못미더운 대답 하나로 끝내버리고 마는 것이다. 떨어졌던 순간부터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불안을. 

 어쨌든 그대는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머릿속으로는 그 약속 역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안다. 한 순간의 유예일 뿐이란 걸 안다. 언젠가는 정말로 시간이 멈추는 날이 올 것이다. 슬픔이 가슴을 짓눌러서 몸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듯 거대한 고통을 안겨줄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 옆에 있는 것으로 되었다. 함께 있어주기만 하면 잊을 수 있다. 곧 다가올 끝을, 지금의 한정되어 있는 시간을. 나는 최대한 길게 이 순간을 지킬 것이었다. 가능하면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길게, 마치 영원토록 지속될 것처럼. 

 계속해서 이 흘러가는 시간을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아, 또 바람이 멈추고 세상이 느려졌다. 시간이 사라지고 빛이 힘을 잃었다. 무뎌져가는 감각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또 다시 떨어져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상이 멸망할 것만 같다. 

 그대만 없으면 난 늘 이렇다. 그대와 헤어지면 난 늘 그렇다. 이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익숙하게 될 날이 올까요? 당신이 없는 영원에 적응하게 될 날이 올까요? 오늘도 대답없는 질문을 던졌다. 












 배틀 이후 옥새 관리자가 된 제갈량. 

 평소에는 일을 하고 주말 정도에만 유비를 만나러 오는데 유비가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걸 자각한 다음부터 답없는 짝사랑이 심해져 분리 불안증 같은 게 생기게 되면 좋겠다. 

 그래서 종국에는 어린아이처럼(물론 말투까지 어린아이 같지는 않음)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게 되는 그런 거 보고싶다. 유비와 관련된 일이면 못내 초조해지고 이성적이지 못하게 되는 제갈량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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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장난으로 들었다고?"

 "아니, 보통, 청혼부터 하지는 않잖아. 대개 고백부터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난, 네가 장난을 치는 줄.." 


 유비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조조는 머리를 짚었다. 아침부터 지나치게 유쾌했던 기분의 반동이 일어나서 그런가, 마음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난 아무에게나 청혼하지 않아. 거짓으로 하지도 않고. 대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아, 아니.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나도 알지, 근데 어젠, 어젠 만우절이었잖아!"


 유비가 다급히 반박했다. 그는, 조조치고는 유머러스했다고 여겼던 어제의 농담을 떠올렸다. 딱딱한 얼굴로 걸어와 말하기에 결투하자는 말인가 했는데 청혼이라니, 조조도 만우절을 즐길 줄 아는구나 싶어 유쾌했는데 그게 진심이었다고? 부끄럽기 이전에 놀라웠다.


 "생각해 봐, 넌 지금까지 날, 그러니까 음,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약간 날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어, 이건 인정하지? 우리 그렇게 친하진 않았잖아. 그런데 네가 갑자기 뜬금없이 나한테 결혼해달라고 말을 했어, 그리고 날짜가 만우절이었어. 그럼 내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는 드물게 이성적으로 설명했다. 유비가 조조보다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조는 듣고 보니 일리는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긴, 말하기 전에 조조 자신도 유비에게 교제 신청을 하는 게 나을지 청혼을 하는 게 나을지 고민하긴 했었다.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엇나가서 '결혼해달라'는 말이 되긴 했지만, 유비가 흔쾌히 '좋아!'라고 대답하기에 그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확인 받아 기뻤었는데. 

 그는 장난인 줄 알았다니. 납득했던 마음이 다시 아래로 푹 꺼져서 조조는 눈썹을 찌푸렸다.


 "만우절을 별로 신경 안 쓰는 사람도 있다."

 "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거잖아?!" 

 "그래서, 무르겠다고? 미안하지만 난 이미 어제 새 집과 가구, 기타 혼수품을 모두 구매하고 식장을 예약한 상태라서 그럴 수 없겠는데."
 "왜 그렇게 빠른 거야?!" 


 이번에는 진심으로 경악한 유비가 말했다. 

 그야 계속 너와 결혼하고 싶었으니까 그렇지. 조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말은 이렇게 했다. 


 "너의 편의를 위해서다. 갑작스러운 청혼에 쉽게 답을 해줬으니 준비는 이쪽에서 하는 게 도리지. 너는 몸만 오면 돼. ...뭐, 중간에 오해는 있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이렇게 풀었으니 됐겠지? 그럼 이제 신혼 여행지를 정하자."

 "잠깐, 잠깐?"

 "사실 신혼 여행지와 호텔도 예약이 끝났다." 

 "그럼 왜 정하자고 한 건데? 아니, 그보다 나 정말 너랑 결혼하는 거야?"

 "미리 정하고 예약했지만 일단 너를 존중하는 모습은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뭐, 서프라이즈로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아니, 존중이라는 게 없는데요, 지금 나 팔려가듯 결혼하게 되는 거 같은데? 저기, 우리 청혼에 대해서 다시 말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결혼식은 한달 뒤다."

 "예??"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탈출 버튼을 누르기 전에 조조는 따박따박 쏘아내듯 말했다. 그는 제 덫 안에 갇힌 유비를 절대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저와는 다른 의도였다고 해도. 어떤 마음이든 옆에 두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 하객 명단은 네가 미리 생각하도록 해라. 사실 오늘 아침에 벌써 청첩장을 다 돌리고 왔지만."

 "예????"

 "아마 도원관에도 청첩장의 여분이 도착해있을 거다. 가서 확인하도록, 그리고 한달 동안 몸 관리 잘하도록 해라." 

 "???"

 

 조조는 말을 마치고 쿨하게 돌아섰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굳어있는, 사랑스러운 신부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것은 혼인 이후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결혼식을 빠르게 준비하려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지금은 그 일들을 해야 했다. 

 대개 돈으로 다 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만우절에 만우절이란 걸 모르는 조조가 유비한테 청혼해서 혼파망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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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윱의 이야기


싫어. 정말 싫어요. 미워할 수 있게 해주세요.

https://kr.shindanmaker.com/745992








 유비가 쉽게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모든 일이 훨씬 쉬워졌을 거라고 제갈량은 늘 생각했다. 

 그에게 이상한 미련과 기대를 갖지도 않았을 테고, 원했던대로 더러운 경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진흙 구덩이를 바라만 보다가 훌쩍 소멸될 수 있었을 거라고. 어떤 것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을 지키며 유유자적 홀로 살다 갈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허무함 뿐인 존재의 의미를 털어버리고 떠난다는 인생 경로는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어쩌다 그를 좋아하게 되어서 이렇게. 설계해두었던 모든 루트와 옆에 둘렀던 모든 벽들을 다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뜨리게 되었는가. 

 정작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래, 그게 화나는 점이었다. 정작 유비는 저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해주지 않을 거면 반하게 만들지나 말지, 왜 그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라서. 허무뿐이었던 신선의 마음은 이제 번뇌와 상념으로 가득 채워진 채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저를 이렇게 만든 이는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시간을 돌려서 과거의 자신에게 지금의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과거의 제갈량은 현재의 제갈량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버그가 걸렸거나, 자신을 속이는 누군가의 음모라고 생각하겠지. 스스로도 절대 믿지 못했을 변화, 그게 유비로 인해 일어났다. 그런데도 유비는 자신이 제 신선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을 꾹꾹 누르다가, 술이란 것을 먹었을 때. 마음의 제어가 풀려, 한껏 풀린 발음으로 "난 당신이 너무 싫어. 정말 싫어요.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그러니 미워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더니,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비는 눈을 예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제갈량, 그 말은 지금 날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지?"  


 아, 젠장, 젠장! 망할 주군.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 

 하고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이번에도 또 주군에게 졌다. 또 한 번 새롭게 반해버렸으니까. 왜 이런 데에만 눈치가 빠를까? 속이 홧홧하게 끓어올랐지만 볼은 또다른 감정으로 불타올라 빨개졌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소주잔을 들었다. 

 

 "나도 제갈량을 좋아해!" 


 하고 주군이 2연타를 날렸다. 눈부신 미소였다. 보기에 퍽 좋았으나 사실 제갈량은 울고 싶었다. 그게 아니에요, 주군, 눈치를 반만 키우면 어떡합니까 상황을 제대로 읽어요, 하고. 

 바보 같은 주군. 당신은 언제 알까요, 당신의 '좋아해'와 내 '좋아해'가 다르다는 것을.  그런 간단한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당신이 너무 싫어, 정말 싫어서 미워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 그러기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제갈량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도요."


 그래서 짧고 소심한 고백으로 상황을 무마시켜버리곤 마는 것이다. 언제나와 같이. 











 모처럼 연성 메이커 마음에 드는 글귀가 나와서 천 자 정도의 짧은 연성 ㅇ0ㅇ

Posted by 브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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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glakdhkfl0123.tistory.com/147

2: http://glakdhkfl0123.tistory.com/158


*앞에 붙여진 숫자는 1편에서 나왔던 숫자와 연동되는 것으로 봐주세요. 

그러니까 2-2라면 1편에서 나온 2와 3의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2-2 




 

 "기다렸어, 유비! 이렇게 만나게 될 수 있어서 다행이군!" 


 그렇게 인사해온 것은 푸른 색 옷을 입은 남자로, 삼군주 중 하나인 손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싹싹한 성격에 호탕한 목소리, 또렷한 이목구비에 호감이 가는 인상을 가진 남자라 유비는 대번에 그가 마음에 들었다.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늦었어. 대체 어디에 있었기에 히어로 본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거지?" 


 그렇게 타박한 것은 붉은 색 옷을 입은 남자로, 삼군주 중 하나인 조조였다. (손책이 말해주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치켜뜬 눈매를 가진 그는 분명 잘생긴 미남이었으나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유비는 첫 만남부터 그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옆에서 손책이 '사실은 이 녀석 나름대로 반갑다는 뜻이야'라고 중재해주지 않았다면 더 말을 붙여볼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조조는 그런 손책에게도 불퉁한 눈짓을 했지만. 

 어쨌든, 자기 소개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제 이름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여기면서도 유비는 더듬거리며 소개를 했다.


 "음, 만나서 반가워. 난 유비고....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많이 알려주면 좋겠어. 아직 길도 잘 모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거든."

 "뭐든지 물어봐도 돼! 처음에는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법이지. 환영한다, 우리의 세 자리가 차게 되어 다행이지 뭐냐. 자, 저기 널 위해 준비한 옷이 있어."

 

 손책이 박수를 치며 환영하다가 의자에 걸려있던 옷을 가리켰다. 중앙에 모여 있는 세 의자는 척 봐도 대장의 자리처럼 보였는데, 그 중 하나에 초록색의 옷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손책과 조조가 입고 있는 옷과 디자인이 같다. 저걸 입으면 유비는 이제 정말 군주 중 한 사람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번에 부담감이 밀려왔다. 옷을 한 번에 입지 못하고 망설인 것은 그때문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내가 나타나기 전에는 누가 군주 역할을 했어? 내 빈 자리는 그냥 너희 두 사람이 채운 거야?" 


 '촉'이라고 수놓아진 자수를 매만지며 유비는 무심코 물었다. 물음에 큰 뜻은 없었다. 그냥, 내가 이제야 나타났으니 너희가 많이 힘들었겠다 같은 뜻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돌아보았을 때 그는 조조와 손책이 어쩐지 미묘해보이는 얼굴로 눈빛 교환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그렇지! 뭐! 군주 대리가 있기도 하고!" 

 "군주 대리?"

 "그 뭐냐, 군주 밑에 '책사'라는 지위를 맡은 사람이 몇 명 있거든. 널 데려왔다던 서서도 네 책사 중 한 명이야. 보통 지략이 뛰어나거나 영리하거나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 맡게 되는데- 그 중 으뜸인 사람이 보통 군주의 대리를 맡지. 가끔 군주가 출장을 가서 자리를 비울 때면 대신 업무를 해주는 그런 거." 

 "아아."

 "참고로 내 책사 중 으뜸은 네가 마주친 적 있다는 주유야. 조조의 책사 중 으뜸은 사마의라는 녀석이고." 

 "그렇구나."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왜 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유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저번에 마주친 적 있던 주유의 모습을 떠올렸다. Checker. 군주의 그릇을 가늠하는 능력을 가졌던 사람. 그녀는 딱 봐도 보통 사람 같지는 않았다. 군주의 바로 밑에 있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겠지. 


 "그럼 네 책사 중 으뜸은 누군데?" 

 "어..." 


 그럼 자신의 책사도 그럴까? 기대가 되었다. 

 다른 대리들은 군주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만 잠깐 잠깐 업무를 대신한다지만 유비는 아예 군주 자리에 앉지 않았었으니, 죽 비어있던 자리를 대신하여 업무를 해왔다면 군주 급으로 능력 있고 대단한 사람일 테지. 이제껏 업무를 계속 해왔다면 아는 것도 많을 테니 그에게 배울 수도 있으리라. 인수인계를 받으며 가르침을 받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제' 책사라지 않는가. 촉의 책사. 자신의 편인 것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되리라. 여기에서 가장 친해져야 할 내 사람이 되겠네! 유비는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눈을 반짝였다. 손책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갈량이라는.. 앤데. 그게.." 

 "제갈량? 으응, 그런 이름이구나. 빨리 만나 보고 싶다!" 


 어쩐지 단어의 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벅찬 기분에 제갈량, 하고 다시 이름을 발음 해보는데 이제껏 그를 난처하게 바라보고 있던 조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로 기대하지는 마라." 

 "...?"


 유비는 처음으로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입을 딱 다문채 조조를 바라 보았다. 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지만 조조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뭐, 만나면 알게 될 테니까.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야. 어쩌면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손책은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유비는 그제서야 덜컥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혹시 제갈량이라는 그 사람이 무시무시한 불량배인 것은 아닐까, 군주들조차 어찌 못할 정도로 나쁜 성격의 사람인 것은 아닐까, 손책과 조조조차 절레절레 하는 사람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 호랑이도 말하면 온다더니." 


 손책이 손목에 둘러진 통신 기계를 보며 툭 내뱉었을 때 유비가 파드득 떤 것은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제갈량이 여기 온다네. 네 얼굴도 보고, 저번에 맡겼던 업무 보고도 하겠대. 그러니까 여기서 첫 인사해. 우리가 있으면 걔도 뭐, 심하게.... 하진 않을테니까." 

 

 손책이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는 유비와 인사를 마친 후 곧장 나가보려던 생각인 것 같았지만 조금의 시간이라면 더 할애해보겠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심하게 뭘? 심하게 뭘 하는데? 뭘 하는데? 둘만 남으면 때리기라도 해? 

 그런 눈으로 불안해하기 시작한 것은 유비 뿐이었다. 손책이 통신을 받았을 때부터 그의 동공은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길한 상상이 갑자기 펄쩍 펄쩍 뛰어 한계선을 넘어 치솟았다. 어느 정도냐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껄끄러움을 느끼던 조조의 뒤에 숨을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였다. 상상 속의 제갈량은 무척 키가 크고 체격도 거대하고 성격도 난폭해서 여기에 나타나자마자 유비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니가 이제까지 안나타났던 우리 대장이냐?' 하면서 시비를 거는 모습이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문이 스르륵 열리고 그 '제갈량'이 들어왔을 때 유비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갈량은 유비가 봤던 어떤 사람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얀 제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제갈량은 '기품'이라는 글자를 사람으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조조도, 손책도 인물로는 빠지지 않는데 그런 두 사람을 방금 전까지 시야에 담았으면서도 '미남'이라고 생각할 정도니 인물은 인물이었다. 조금 다른 형태의 미(美). 어느 쪽이 취향이냐 하면, 유비는 이쪽이었다. 그때문에 그는 잠시 눈앞에 나타난 책사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책사 제갈량, 군주를 뵙습니다." 


 그렇지만 똑바로 걸어들어온 제갈량이 자신을 보고 허리를 숙였다 펴며 고개를 올렸을 때 마주친 눈빛에서 유비는 깨달았다. 손책과 조조가 저에게 난처한 기색을 보였던 이유를, 그제야 비로소. 그 눈빛을 보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유비를 싫어했다. 












2-3 



 


 제갈량에 대해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는 유비를 싫어한다. 


 그 이유를 알 순 없었다. 분명 손책과 조조는 아는 것 같고, 제 부하들 중 몇 명도 짚이는 게 있는 것 같았는데 그들 중 누구도 유비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자신을 군주라고 살갑게 부르면서도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것에 가끔은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은 서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울면서 한탄하면 관우나 장비는 결국 말해주었을 것이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 유비는 마음을 꾹꾹 삼켰다. 


 제갈량에 대해 알게 된 사실 둘. 

 그는 서서를 좋아했다. 


 어라, 이건가? 

 처음 서서를 맞이하는 제갈량의 모습을 보았을 때-그것도 우연히, 숨어서 보게 된 것이었다. 업무에 지쳐 산책을 나갔을 뿐인데 두 사람이 정원에서 나란히 걷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유비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제갈량이 맞는지 제갈량의 탈을 쓴 마물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했지만, 저와 함께 옆에서 두 사람을 훔쳐보던 포지션의 조운이 '원래 제갈량은 서서의 앞에서 인격을 갈아끼운다'고 헐뜯는 것을 듣고서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격을 갈아끼운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질 정도로 제갈량이 서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은 이미 본부에서 유명한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걸 자신만 몰랐다. 유비는 잠깐 가슴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제갈량에 대해 알게 된 사실 셋. 

 그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다. 


 서서를 좋아하는 게 맞겠지. 저 얼굴은 그냥 친구에게 보여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명백한 애정.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은 환한 빛을 담고서 반짝이고 있었다. 유비는 그를 넋놓고 멍하니 바라보다, '이것이 단서인가?'라는, 이 상황에서 하기엔 더없이 비참하기 그지 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제갈량이 서서를 좋아하는 것이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미 유명한 사실이지만요, 둘은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대요."
 "...그래?"

 "네, 둘 다 부모가 안 계시다고 해요. 6살때부터 쭉 같이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뭐, 요즘 세상에 학대하는 원장이 어디있겠느냐만은, 꼭 부모처럼 살가운 원장만 있는 건 또 아니잖아요? 그런 무심하고 서먹한 곳에서 자라다보니 둘이 형제처럼 꼭 친해지고 어쩌고- 그런 흔한 스토리죠." 


 그들의 사정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지 조운이 태연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같은 학교를 다녔고 히어로 본부에도 같이 들어온 동기 사이이며 임무를 할 때도 초기에는 늘 함께였기 때문에 갖는 유대감이 대단할 것이라고 말이다.

 본부에 적응이 된 다음부터 사람들에게 살가운 성격인 서서는 친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지만 까탈스럽고 도도한 천재인 제갈량은 그러지 못해 지금도 친한 지인이랄 것이 서서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집착 비슷한 것까지 보인다고. 모르는 것은 서서뿐이라고. 저도 제갈량을 능력있고 좋은 동료라고 생각하지만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그런 의미에서는 서서가 참 대단하다고 조운은 말했다.


 "제 생각에는 저 정도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제갈량의 집념이나 저 정도로 사랑하는데도 알지 못하는 서서의 눈치없음이나 동급인데 말이죠."

 

 제갈량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유비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저렇게 열띤 시선을 대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가, 저렇게 명백한 애정을 대체 어떻게. 그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인데도 어떻게 서서를 모를 수 있을까? 가슴이 다시 욱신거렸다. 

 나는 누릴 수 없는 다른 사람의 것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것에, 유비는 익숙했다. 그런데도 아픔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그는 아까부터 생각했던 것에 결론을 내렸다. 제갈량이 저를 싫어하는 이유가 서서 때문이 맞는가 보다. 저를 찾아내어 히어로 본부로 데려온 것이 다름아닌 서서였으니까. 그걸 듣고 저를 보러 왔었으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어했던 거겠지. 그때의 서늘한 눈초리가 서서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축 쳐지는 기분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본부에 들어온 뒤로도 유비는 낯설은 기분이 들 때면 서서에게 의지했다. 히어로 본부에서 유비가 처음으로 만든 친구가 서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비를 많이 좋아했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었으며 좋은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비가 서서에게 흑심을 품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를 많이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다. 서서와 함께 헤실헤실 웃으며 돌아다닌 적도 많았으니 제갈량이 보기에는 퍽 아니꼬왔을 것이다. 아아, 유비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붙잡았다. 


 "다음부터는 서서한테 좀 거리를 둬야겠어."

 "아, 저 뺀질이한테 미움을 덜 사시려고요?"

 "그런 것도 있고."


 유비는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조운 역시 제갈량의 저런 모습을 더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유비를 따라왔다. 이제는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한 촉 진영의 복도를 걸으며 유비는 아까부터 줄곧 따가웠던 가슴의 통증을 진정시켰다. 


 이제는 정말 짝사랑을 끝내야 할 때인가보다. 그는 생각했다.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를 싫어하던 상대였으니 가망이 없던 것은 확실했지만. 어떻게 그 마음을 돌려볼까 하던 것도 소용 없는 거라면 이 마음을 끝내는 게 옳았다. 그날 유비는 생애 처음으로 가져보았던 짝사랑의 마음을 조각내어 휴지통에 버렸다. 









3-1



 그렇구나, 그랬구나. 

 제가 열심히 '나는 제갈량 너의 연적이 아니다'를 어필했는데도 제갈량이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이유를 유비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왜 본부의 누구도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는지도 알았다. 하긴 상사에게 그런 말을 하긴 좀 그랬을 것이다. 유비는 비로소 모두를 이해했다. 


 이해하고 나서는 좀 슬펐다. 짝사랑의 조각은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 부스러기 파편들이 박혀 있었는지, 괜히 눈물 같은 것이 나게 했다. 


 '역대 유비와 제갈량들 사이의 인연'이 왜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인지. 

 그런 인연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제갈량이 그토록 그것을 싫어한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는 거라면 유비는 버려야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유비가 마지막으로 붙잡기로 한 건 '제갈량의 친구'라도 되자는 것이었으니까. 

 어차피 사랑 같은 것은 받아본 적도 없지 않은가. 제 것이 아닌 것을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유비는 마지막 남은 짝사랑의 파편까지 모조리 긁어내어 버려버리고는,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들어올 수 없도록 심장에 단단히 울타리를 쳤다. 

 손책의 말대로 안다고 해서 어떻게 고칠 수 없는 문제를 고쳐보려면 포기가 필요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3-2



 "제갈량, 넌 내 취향이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하게 될 일은 전혀 없을 거야! 내가 죽는 날까지 절대로! 내 이름에 걸고 맹세해!"


 제갈량의 사무실에 쳐들어간 유비는 말했다. 온통 거짓으로 뒤덮인 말들을 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곧 진실이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군주 유비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마음을 닫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4-1





 커다란 희생이 있었다.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던 갱단을 모조리 검거하기 위해, 히어로 본부는 몇 달에 걸친 준비를 거듭해왔다. 

 유비는 범인들을 모두 살리기를 바랐다. 죽어 마땅할 죄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히어로의 일은 심판이 아니라고. 그들은 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며 죄인들을 히어로가 직접 단죄하게 되면 질서가 흔들릴 거라고 말이다. 사람들을 도울 능력이 있기 때문에 히어로가 된 것이지, 일반인들을 심판할 자격 같은 것을 가지고서 히어로가 된 게 아니라고, 그러니 그 이상의 것을 넘보면 안 된다고. 

 제법 군주다운 발언이었다고 제갈량은 평가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리버리한 사고뭉치이던 그의 주군는 이제는 제법 군주로서의 티를 내고 있었다. 히어로로서의 자각도 잡힌 것 같았다. 저게 유비 이름을 가진 자들의 본능, 혹은 운명일까? 제갈량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흘끗 유비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유비가 그어준 선 때문일 것이다. 정말이지, 그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 맹세 같은 걸 할 줄이야. 물론 제갈량으로서는 군주와 계속 냉랭한 사이로 있는 것보다는 선을 그은 채 적당한 동료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나았으니 감사할 일이었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유비는 계속해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입밖으로 소리내지는 않았지만 제갈량 안의 유비의 점수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조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범인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다운 말이었다. 히어로가 심판할 자격까지는 없다는 유비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는 죄를 지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겼다. 그들 때문에 민간인들이 죽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는 조조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유비도 수긍하는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불살 원칙을 고수했다. 

 중간에 있던 손책이 유비의 편을 들어, 히어로 본부의 작전은 범인들을 모두 생포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유비가 조조의 의견을 이긴 것은 처음이라 제갈량은 아무 사심 없이, 일단은 같은 진영이고 자신의 주군이긴 했기 때문에, 이번 작전이 무사히 수행되길 바랐다. 그리하여 유비가 기뻐할 수 있기를. 무심코 그렇게 바랐던 것 같았다. 


 그리고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전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범인들은 모두 살았고, 민간인 희생자도 없었다. 그렇지만 히어로 본부의 사람 몇이 죽었다. 

 그 중에는 촉 진영의 사람도 있었다. 유비와 자주 말을 하던 시티즌과 히어로도 있었다. 

 작전은 성공이었지만 유비는 웃지 못했다. 


 히어로 본부의 사람들이 모여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장례식 날엔 비가 왔다. 

 하루종일 다 창백한 낯빛으로 마치 제가 죽은 것처럼 서 있던 유비는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쓰러질 것처럼. 

 유비와 많이 가까워졌다곤 하나 그에게 한 번도 손을 뻗은 적 없던 제갈량이 보다 못해 손을 뻗을 정도였다. 저기 의자에 앉아서 좀 쉬시지요 주군, 하고서. 

 그렇지만 유비는 정중하게 제갈량의 손을 거절했다. 제갈량이 먼저 저에게 말을 걸기라도 하는 날이면 눈에 띄게 기뻐하던 것이 이번에는 없었다.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냐, 됐어. 저기... 난 한 번 더 관을 보고 싶어."

 "밖엔 비가 오는데요." 

 "제갈량답지 않은 말이네."


 유비가 힘없이 던진 말에 제갈량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군주의 능력은 염력, 물체를 움직이고 조종하는 능력. 안 그래도 대단하던 힘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의 물을 갈라 길을 만들고, 불이 난 곳에 강물의 물을 옮겨와 끼얹는 정도의 능력이다. 비 같은 것을 맞을 리 없지 않은가. 물방울들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옆으로 흐를 것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관 앞에서 혼자 기도라도 하려나 보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머리를 식힐 수도 있겠지. 어차피 비도 안 맞는데. 그리 생각하며 자기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군주는 들어오지 않았고,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낀 제갈량이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의 군주는 비를 맞고 있었다. 

 

 결국 비 맞고 있을 거잖아, 그렇게 처량한 척을 하면서. 관앞에서 비맞으며 우는 건 또 뭐야. 마음은 알겠지만 꼴사납잖아, 다 그의 잘못인 것도 아닌 것을. 그렇게 책임을 다 몰아지려고 할 필요도 없는데. 삐뚤어진 생각을 하면서도 제갈량은 평소와 같이 비아냥거리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그저 빠르게 그에게 걸어갔다. 말없이 우산을 씌워주었을 때 인기척을 느끼고서 뒤를 돌아본 유비는 조용히 말했다. 


 "난 틀리지 않았어."

 "..." 


 제갈량은 정말 놀라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유비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후회하고 있을 줄 알았다. 제가 범인에게 무른 결단을 한 것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신의 결정을 잘못되었다 생각할 줄 알았다. 한 번에 꺾여서 이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줄 알았다. 이제껏 봐왔던 그는 퍽 무르고 다정하며 유약한 사람이었으니까, '나 때문에 그들이 죽었어'하며 징징거리는 말을 던져올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름이 돋았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의 눈 안의 신념은 바락바락 외쳤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난 틀리지 않았어,'하고.  

 

 "하지만... 하지만 더 강했다면 좋았을 걸.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더 강했더라면. 내 신념을, 내 가치관이 옳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강했더라면...."


 유비의 눈에서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그것은 볼을 타고 턱으로 내려갔으며, 제갈량은 그 눈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토할 것 같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갑자기 후끈 온도가 올라간 것 같았다. 

 

 끝까지 제 정의를 놓지 않는 사람. 짓밟히고 꺾인다 해도 옳다고 생각한 것에 타협을 하지 않는 사람. 끝내 모두를 지키지 못한 것에 제 약함을 서러워하는 사람.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리, 사랑스러울까. 


 제갈량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유비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는 다시 관을 보고 있었고, 떠나버린 사람들을 위해 울고 있었다. 그런 그를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네줄 수도 있었겠지만 제갈량은 그러지 못했다. 입을 열게 되면 튀어나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눈 그대로 나를 봐달라는, 이 상황에 맞지 않는 얼토당토 않는 말이. 






Posted by 브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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