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왜 울고 있니?" 


 머리를 반 정도만 묶어 올린 여자아이는 쭈그려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만으로 눈앞의 사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주 놀러오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아버지보다 더 젊고, 잘생기고, 친절해서 그녀를 예뻐하는. 

 연은 눈물을 쓱 문질러 닦고 고개를 저었다. 안기라는 듯 벌리는 두 팔에 자연스럽게 다가가면서. 

 '제갈량 삼촌'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올렸다. 


 "또 놀림 받은 거야?"

 "...네."

 

 그렇지만 속상했던 것도 사실이라 '어른들에게 걱정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던 꼬마의 마음은 금세 무너졌다. 자상하게 얼러오는 목소리에 더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참고 이르자 제갈량은 그녀를 따라 눈썹을 찡그려보였다.


 "삼촌이 혼내줄까?"
 "아니요." 

 "놀리는 건 나쁜 일인데? 그 애들은 나쁜 사람들인데?"

 "그렇지는... 않아요." 


 삼촌이 제 편을 들어주는 건 좋다. 대신 혼내준다는 것도 좋았다. 연은 지난 경험으로 인해 제갈량 삼촌이 저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꽤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나쁜 사람들을 따라갈 뻔했을 때, 절 구해줬던 삼촌은 아버지에게 무섭게 화를 냈었지. 삼촌보다 더 나이도 많은 아버지는 제갈량이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화를 냈어도 어찌할 바 모르고 쩔쩔매기만 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삼촌이 나서준다면, 그러면, 요즘 세상에 무슨 '비룡권'이냐며 놀리던 아이들도 입을 다물겠지만. 

 그래도 이건 제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까부는 그 녀석들이 정말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니었고. 그 애들은 좀 짓궂을 뿐이고, 아직 많은 걸 모를 뿐이다. 분명 납작 밟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녀석들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가 비룡권을 더 잘하게 되서 인정을 받으면 걔들도 더 이상 놀리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넌 정말... 네 할아버지랑 똑같구나."


 집으로 다 와가는 걸음, 묵묵히 연의 말을 들으며 걷던 제갈량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연은 그 뒷말을 똑똑히 듣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는 이제 가족과 사촌, 조부와 친척의 이름을 하나 둘 씩 외워갈 시기였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기억 속의 흐릿한 말아버지의 이름을 대었는데.


 "아니, 그 사람 말고."


 제갈량은 애매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또 누구를 말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대문의 안쪽까지 성큼 들어와 있었다. 제갈량을 알아본 연의 어머니가 반색하고, 안겨있는 연을 발견한 뒤 놀라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연의 작은 머리는 금방 궁금증을 잊고 어머니의 호들갑에 말려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연이 왜 도장에 나가지 않았냐며, 오늘 하루 종일 아빠와 엄마가 걱정하면서 찾아다녔다는 야단을 듣는 동안 한 걸음 물러난 제갈량은 여느 때보다는 소란스럽지만 이것 역시 일종의 평화인 이 가정을 묵묵하고 조용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덧씌우면서. 


  

 당신도 어렸을 때는 저랬을까요?


 제갈량은 속으로 누군가에게 물었다. 주군과 같은 눈을 가진 어린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가 묻곤 했던 질문이었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지만. 


 인간의 유전자라는 것은 신비한 거라서, 부모와 자식 간에 부정할 수 없는 핏줄의 흔적을 남기지만 때로는 그 닮음이 세대를 거쳐서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연도 그와 같은 경우였다. 이제 그의 주군 유비는 '할아버지'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관계를 표현하기에는 먼 세대가 되었지만 제갈량은 유연을 통해서 유비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아이는 그가 봐온 유비의 아이들 중 가장 그를 많이 닮아있었다. 그러니 애정이 갈 수밖에. 

 그저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유정이 아버지가 되었다고 하면서 저에게 제 갓난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때를 기억한다. 그때 제갈량은 유정 역시도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던 갓난 아이였음을 기억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또 그의 아버지도 그랬지.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제갈량! 내가 아빠가 됐대!"

 

  해맑은 웃음으로 가장 먼저 저에게 달려와 제 아이를 보여주었었다. 

 그때 제갈량은 인간의 아이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주군과 쏙 빼닮은 어린 아이가, 그렇게 작은 머리를 가지고서도 의지를 가진 채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걸 보는 건 무척 신기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한동안 정신없이 내려다보며 눈을 떼지 못했던 것도 생생한데, 아이는 빠르게 커버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버지를 많이 닮지 않았지. 외모는 그렇다 쳐도 성격은 그 아버지에 비하면 많이 나약했었다. 

 그런 아들의 밑에서 태어난 손자 역시도 그랬고. 

 

 같은 상황에 처해도 유비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그들에게는 실망스러웠지만 유비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제 아들과 손자를 사랑했으니까, 제갈량도 그들을 지켜봐주었다. 아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옳을지도 모른다. 영원을 사는 삶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란 이제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마음을 늦게 깨닫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들 하지만 제갈량은, 눈을 감은 유비가 행복한 하얀 재가 되고 난 뒤에야 마음을 깨달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이 떠난 뒤에야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 건 미치도록 서글픈 일이었으나. 만약 그가 살아있을 때 저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그는 체면이란 걸 모두 벗어던지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정한 유비는 진짜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일단 받아주고 보았겠지. 그는 저를 많이 아꼈으니까. 그렇게 주군과 연인 관계가 되었다면 전 무척 행복했겠지만, 지금도 가정을 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질 만큼 안타까운 꿈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랬다면 대를 이어서 저와 계속 함께 해줄 이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주군과 저는 후손을 남길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의 이 상황이 낫다. 식사를 마친 뒤 잘 먹었다며 씩씩하게 제 방으로 들어가는 유연의 모습을 보며 제갈량은 생각했다. 짧은 순간 사랑을 한 뒤, 영원을 살아가며 그 사랑을 추억하는 것보다 그리움으로만 남게 되었다 해도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이 옆에 영영 남아있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분명 저는 유씨 성을 가진 아이들에게서 제 주군을 보고 있었고, 그들에게 가진 애정의 기반은 이제 세상에 없는 주군에 대한 사랑. 질기고 애끓는 이 연모 때문에 고통받는 생을 살고 있다 할 지라도 그의 흔적들은 옆에 남아있으니까. 

 연처럼, 그를 똑같이 닮은 아이들이 또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한참 늦어버린 순간에 속으로만 고백하고 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유비는 제갈량보다 한 발 앞서서 그를 좋아했지만 그가 저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접고 결혼했을 거라는 설정. 

 제갈량은 유비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되게 이상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 첫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걸 볼 때도, 부인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입맞춤을 할 때도 따끔따끔한 질투를 느꼈지만 내내 알지 못하다가 유비가 저에게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은 뒤, 그가 화장되고 나서야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그를 다시 볼 수 없음을 실감하고 그제야 깊은 마음을 깨달았을 것 같다. 


 시간이 오래 가면 사랑도 무뎌진다지만 늘 젊고 영원한 신선은 그 감정 역시 쉬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유비가 남긴 아이들의 옆을 계속 맴돌며 지켜주고, 가족의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 가장이 되면 제갈량의 정체(신선)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에 유연도 나중에 가서 제갈량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때야 그가 아버지보다 젊은(것처럼 보이는)데도 반말하는 이유를 알게 될 듯. 

 가차없는 독설을 날리던 성격도 유비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 앞에서는 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제목은 GUMI- 지구 최후의 고백을 에서 따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타ㅁ 버전으로 첨부. 

https://www.youtube.com/watch?v=oPa09a6o0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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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브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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