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 반대로 유비가 먼저 좋아하게 되는 거 보고싶다 

1 http://glakdhkfl0123.tistory.com/136 <과 이어지는 글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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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좋던 어느날 오후, 유비는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상대가 제갈량이라는 게 고생길의 서막이었다.







3


 제갈량의 옆에 있으면 늘 상반된 기분이 든다.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도망가고 싶고. 계속 보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못 보겠고.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은데 또 귀를 막고 싶었다. 

 그가 저를 봐줬으면 좋겠는데 또 안 봤으면 좋겠고, 제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주군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복잡한 마음이 사랑인 건가? 정말 사랑인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은 유비를 혼란하게 했다. 

 심장은 운동장 몇 바퀴를 뛰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하게 뛰고, 얼굴은 잔뜩 붉어지는 걸 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증상이 맞는데. 사랑이라니,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니! 게다가 그 상대가 제갈량이라니?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모를 정도로 꼬인 문제라서 유비는 머리를 부여 잡았다. 


 사실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제갈량을 좋아하는 게 쉬운 일이긴 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한 팀이며, 늘 저를 챙겨주고 지켜주며, 능력도 뛰어난 대단한 사람이니까. 거기에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크고 멋있었다. 성격은, 음, 다정한 건 아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그만하면 제가 반한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않을까.? 


 아니, 이상한 건가? 어쨌거나 그는 저의 신선이다. 같은 팀의 동료에게 사심을 품은 게 잘한 일인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품은 것 자체가 잘못된 건가? 생각해보면 인간도 아니잖아? 유비는 그를 인간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신선 입장에서는 인간이 저에게 호감을 품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일 수 있었다. 그럼 어떡하지? 역시 잘못된 일인가? 

 생각을 이어가던 유비는 혼란에 빠졌다. 조그만 머리통은 곧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감정들로 가득차 복잡해기지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두 명의 유비가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가운데에 있는 유비는 두 유비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유비의 의견이 맞소 노란 유비의 의견이 맞소? 하면 두 유비의 의견이 다 타당하니 알지 못하겠소, 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나, 이중인격인가 뭔가 하는 그런 게 아닐까."

 "? 뭐 잘못 드셨습니까?"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멍하니 내뱉은 말에 칼 같이 온 것은 제갈량의 대꾸였다. 그제야 그가 제 옆에 있던 걸 알았지만, 평소라면 얼굴이 붉어진 채 의식했을 것도 깊이 고민을 하다보니 별로 의식이 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유비를 보고 있었는지 제갈량은 그의 주군이 빨래를 엉망으로 개는 것을 보고서 그의 상태가 뭔가 이상한 걸 알아챈 듯 했다. '늘 착착 각잡힌 상태로 옷을 개던 주군이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 생각하는 얼굴로 그는 유비 이마의 열을 재려고 했지만, 놀란 유비가 몸을 뒤로 빼는 사람에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하도 굴렸다 보니 그가 다가올 때 몸을 빼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아, 깜짝이야!"


 저렇게 잔뜩 진심으로 놀란 채 얼굴을 가릴 필요까지는 없었지, 역시. 저도 모르게 과잉 반응해버린 것에 유비가 몸을 굳히자 제갈량은 머쓱하게 손을 거둬들였다. 


 "열이 있나 걱정이 되서 그랬습니다. 주군께서 그렇게 반사 신경이 좋으신 줄은 몰랐군요. 배틀에서도 그렇게 하시지요."

 "그럴게! 열은 없어.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야."

 

 ...비꼬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걸 보니 평소의 주군이다. 제갈량은 조금 안심하며 손을 다시 패드로 가져갔다. 열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유비는 다시 침착하게 빨래를 개기 시작했고, 제갈량은 그쯤 되어 신경을 껐지만, 유비는 갑자기 가까워졌던 제갈량의 얼굴로 인해 혼란을 반강제로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이게 옳든 옳지 않든 나는 제갈량을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고. 

 사실상 부정기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후 삽질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포기하자는 생각을 하고 그 시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사랑은 오묘한 것이라 한 번 들어온 자리에서 보통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쯤 되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어느새 너무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선 이 마음을. 

 

 유비가 '그 이후'를 생각하기 시작한 건 더 이상은 숨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뒤였다. 태어나서 고백이라는 걸 해본 적은 없지만 거절 당할 때 당하더라도 말은 해보리라. 그렇지 않으면 비밀을 숨긴 게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의지의 표시로 주먹을 꽉 쥐었다. 








4


 "다, 달이 아름답네!"

 "그렇군요."

 "..."


 제갈량은 드물게 솔직한 감상을 내어놓으며 부채를 살랑거렸지만, 조마조마하게 그의 눈치를 살피던 유비는 그 반응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멘트로 말을 틀지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장 마음에 든 걸 찾은 건데. 너무 돌려 말한 것일까. 제갈량은 그 뜻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계속 흘끔흘끔 보아도 그가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 유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바늘을 찔러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태연한 얼굴로 달 감상을 하고 있는 이에게 사실 이게 좋아한다는 말을 돌려 말한 거라는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첫 고백이 무산된 것이 실망스럽기도 했고. 

 윽, 그래도 괜찮아. 못 알아 들은 것 뿐이잖아. 제갈량은 신선이니까 인간들 사이의 비유적인 표현은 모를 수도 있어! 어차피 나 외엔 아무도 모를 테니까 다음에, 다음 기회를 노리자. 유비는 속으로 울상을 하며 생각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빈말로 꺼낸 건 아니라서 달은 아름다웠고, 이 밤에 같이 있으니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 다음에 제갈량이 '이렇게 밝은 밤에는 수련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한 것에는 조금 질려버렸지만. 









 5


 "제갈량과 계속 함께 하고 싶어."

 "?"


 아침, 유난히 정성을 들인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를 접시에 얹어주며 유비는 말했다. 딴에는 긴장하여 손에 땀이 찰 지경이었지만 거울을 보고 몇 번 연습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다. 다만, '평생 같이 하고 싶어'일 예정이었다가 조금 삐끗했지만 그 정도의 뉘앙스는 알아들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는 것 같은 제갈량의 표정에 가슴이 쿵 떨어졌지만. 


 "그럼 그러지 않을 생각이셨습니까? 신선들은 주군과 계약을 맺으면 끊지 못합니다."

 "아....그게..."

 "...아니면, 저도 언젠가 서서처럼 소멸될 거라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아니, 내 말은."

 "주군이 약하고 생각 없으시긴 하지만 제 능력은 대단하니,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그만 하시고 훈련이나 열심히 하시지요."


 네 알겠습니다.우리의 관계가 배틀 우선인 관계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 제갈량... 이게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던가? 유비는 허허 웃다가 고개를 젓고, 애매하게 고백을 해버린 자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렇게 말했으면 당연히 배틀에 관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 자신과 그의 관계 역시 특수하니 그럴 수밖에. 괜히 돌려 말했다가 '약하고 생각 없다'는 야단까지 들었다. 매일매일 듣는 말이지만 괜히 축 쳐졌다.

 훈련을 할 때마다 공격력이 약하다고, 제대로 맞추질 못한다는 소리를 듣더니 여기에서도 저는 그런 모양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고백의 말을 던져넣는 건 이렇게 힘들구나. 아니면 제갈량의 방어력이 높은 것일 수도 있었다. 신선인 제갈량은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니 마음을 전하려면, 역시 노력해야 해. 

 빈 접시를 가지고 돌아서며 유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6


 "저, 저기, 좋아해!"
 "저도요."

 "?!"


 너무 빠른 대답이 날아왔다! 그가 제 고백에 대답할 것을 여러 번 상상하긴 했지만 저것은 상상 이외의 답이었다. 그래서 유비는 이게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볼을 꼬집어보지 않아도 되었다. 제갈량이 '저도요'라고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제가 고백을 했는데도 저런 대답을 들으니 얼떨떨해진달까, 눈앞의 이 남자가 진짜 제갈량이 맞는지 의심이 든달까, 역시 지금이 장각이 농간을 부린 환각 속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멍하니 서 있으니 제갈량은 그를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뭐합니까?"
 "어? 아니, 그, 좋아한..."

 "네, 좋아해요. 소시지."

 "..."


 잊고 있었다. 제가 그에게 소시지를 건네던 중이란 것을. 오늘은 '좋아한다'는 말을 꼭 직접적으로 말하겠다는 생각에 긴장하다 보니 상황을 가리지 않고 말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제갈량은 제 말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것이다, 하필 소시지로! 제 가장 큰 라이벌(?)로! 

 타이밍도 참 어이없지, 조용히 분위기를 잡으면서 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정신을 놓고 이런 때에 말해버린 걸까? 역시 소시지 접시를 건네주면서 고백한 제 잘못임이 틀림없었다. '좋아해'라는 말에 단번에 그 상대를 소시지로 판단한 제갈량도 제갈량이지만.... 연달아 실수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유비의 어깨는 쳐졌다. 간신히 짜내어서 '좋아한다'는 낯간지러운 단어를 입에 올렸는데, 여기서 '사실 상대는 너'라고 말할 용기는 더 남아있지 않았다. 영웅심이 바닥난 기분. 유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섰다. 아직 다음 기회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망은 없어 보였다. 



 


 7


 좋아해, 가 안 된다면 역시 그 다음은. 


 "사랑해."


 일까? 

 아, 입에 담기엔 너무 낯간지러운 말이다. 


 제갈량을 이 세상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좋아한다고 여기면서도 유비는, 아직 그에 대한 제 감정이 열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제갈량을 많이 좋아하고 늘 옆에 있고 싶고 얼굴을 자꾸 보고 싶고 말을 걸고 싶고 닿고 싶지만 이 간질간질한 마음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어색해보였다. 처음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게 사랑인가' 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랑해"라는 말을 할 자신은 또 없었다. 

 그에게 사랑은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주위를 둘러싸는 온갖 장애물들을 헤치고 갖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버려가면서 이루어내는 것에 붙이는 용어였다. 세상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열정적인 불타는 감정. 그게 사랑이었다. 넓은 범주로 치자면 제 마음 역시 사랑이지만, 아직 이런 말을 하긴 좀 어색하다. 


 이렇게 그를 많이 좋아하면 언젠가는 나도 그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 가서 지지 않을 텐데도.


 "사랑해..." 


 역시 이건 아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고백을 해 본 유비는 시선을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좋아한다는 말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저에게는 무거웠다. 묵직하고,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았다. 고백을 해보았자 거짓말을 하는 것 같고, 또, 이런 말을 듣는 제갈량도 부담스러워서 도망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고백에서 누가 난데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하겠어. 어느 정도 원숙한 연인들이 아니고서야 느닷없이 눈앞에 열렬한 단어가 들이대진다면 누구라도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갈 거였다. 제갈량이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저 역시 실망할 테고, 무지 상심해서 영웅심을 더 까먹을 수도 있을 테고. 그러니....

 

 "...그냥 포기할까."


 여기까지만 할까. 유비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비단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부족하다는 이유 만으로 도망가려는 건 아니고, 이 말을 연습하고 연습하면서 쌓아왔던 충동이 이제 폭발하려는 것이었다. 준비했던 고백들이 하나 둘 씩 꺾이면서 쌓이기 시작한 그것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연습하면서 점차 초라해지는 유비의 거울 속 모습을 보며 배가 되어, 자신감을 깎아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까지는 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한 번 하고 그만 두나 지금 그만 두나 제갈량은 모를 거란 생각을 하니 힘이 빠진달까. 또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갑자기 시도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제갈량이 좋아서 좋아한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언제고, 이렇게 연달아 막히니 답답해져서 다 놓고 싶어졌다. 바로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짜내었던 용기는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까지 전했다가 막히면 더욱 상심할 것 같았고, 그 결과가 거절이라면 더더욱 실망할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까지만 할까. 고백을 하려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당장 바로 좋아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차분히 배틀에만 집중하면서 수련을 하면 언젠가, 언젠가 이 마음도 접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이들의 짝사랑이 다 그렇듯이. 저 역시도. 


 "그만 둔다고요?"

 "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 유비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거울을 보니 문가에 제갈량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던 걸까, 설마 연습하는 걸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어째서 그의 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했을까. 그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백을 생각하던 중에 당사자가 들이닥친 것도 닥친 거였지만, 제가 바보스럽게 연습하던 것을 들켰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몰려오는 쪽팔림이 장난 아니었다. 아마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뭘 하고 있는 중이냐고 묻겠지.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눈이 팽팽 돌았다. 머리가 새하얘진 와중에도 없는 잔머리를 쥐어 짜서, '드라마 대사를 따라하던 중이었다'는 그럴 듯한 핑계를 생각해냈는데 이런 당황한 목소리로는 변명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유비는 쩔쩔매며 제갈량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상하게 그는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만 둡니까?" 

 "어?"


 그럴 만도 하지, 수련은 빼먹고 여기서 이러고 있었으니. 라고 생각하던 유비는 예상 외의 대답에 그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입에서는 방금과 같은 멍청한 대답이 또 나갔다. 

 눈을 끔벅거리며 쳐다보자 제갈량은 팔짱을 끼었다. 


 "그렇게 그만 두는 게 주군에게는 쉽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어, 아니... 난.."

 "주군이 사랑을 한 번도 안 해보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포기하실 줄은 몰랐군요. 드림 배틀은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좋아하는 사람이 배틀보다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들었어, 들었네. 역시 다 들어버렸네. 


 거울에 대고 사랑한다고 바보처럼 중얼거리던 걸 들켜 창피해진 마음과, 제가 포기하려는 것을 지적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함이 한 번에 일어나서 유비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다.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서 뭐라고 이게 뭔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냥 모르는 척 해주지. 어차피 내가 누구한테 하려고 하는 말인지도 모를 거면서. 제갈량이 어서 다른 상대에게 고백하라고 부추겨보았자 하나도 기쁘지가 않을 거였다. 그는 저에게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씁쓸함 밖에 얻는 게 더 있나. 그리고 남의 일이라고 고백을 그렇게 쉽게 말할 건 뭐야. 하다 못해 도와주겠다는 말이라도 해주던가. 유비는 불퉁한 얼굴을 하고 그를 째려보았다. 


 다만, 본인의 착각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별로 좋지 않은 표정이던 제갈량의 얼굴에서 묘한 웃음기를 찾아내어서. 

 내가 잘못 본 건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는 마침내 읽어냈다. 유비치고는 예리하게 그 기색을 알아차리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심술을 부리는 것 같은 목소리 속의 장난기를. 의미심장한 눈빛을.

 장족의 발전이었다. 제갈량의 기색을 이 정도로 읽어낸 것만 해도 그를 좋아하기 시작해서 열심히 관찰한 보람이 생긴 거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꼭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유비는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너, 너.........알고 있었구나!"


 말의 끝은 마치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높았다. 갑자기 빽 크게 외친 꼴이 되었지만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비가 겪고 있는, '미쳐 날뛸 것 같은' 심정에 비하면. 안 그래도 시뻘겋던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홍당무라고 해도 믿을 얼굴로 손을 파닥거리며 그는 계속 외쳤다. 


 "알고 있었지?! 내가 너한테 고백하려는 거!!"

 "뭐..."


 세상에. 믿을 신선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뒷통수를 맞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유비는 믿었던 우리 애가 범죄자가 된 것을 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제갈량은 웃으며 말했다. 


 "주군이 그렇게 티를 내놓고 모르길 바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이, 이..!"


 나쁜 녀석!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 멍게! 쏘아주고 싶은 욕은 산더미처럼 있었으나 너무 열이 난 유비의 입 안에서 제대로 된 발음을 되찾지도 못한 채 뭉게졌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게 분노인지 부끄러움인지 창피함인지는 유비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거 지금이라도 나가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니! 다 알고 있었다니! 방금 사랑해, 라고 말하려던 상대가 자기란 것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는가. 포기하지 말라고 한 건 저를 놀리려고 그랬음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안 거지? 그렇게 티가 났나? 나름 숨기고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아, 정말 끝이다. 너무 격렬한 감정이 폭풍처럼 머리를 점령한 가운데 유비는 제갈량에게 더 뭐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서 얼굴을 감쌌다.


 "안녕, 나 죽으러 갈래."
 "그건 안 되죠. 우린 지금부터 할 말이 많을 텐데."


 뇌의 퓨즈가 나가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려던 유비를 제갈량은 점잖게 잡아챘다.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려는 그의 신선에게 안타깝게도 유비는, 생애 처음으로 '어떻게 죽어야 아프지 않고 한 방에 갈 수 있을까' 같은 걸 생각하는 것으로 작은 머리통이 꽉 차 있었다. 











8

 

 "달이 아름답네요, 는 사실 주군치고는 꽤 서정적인 고백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내가 왠만하면 우는 사람이 아닌데 눈물이 나네. 

 유비는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접은 무릎에 파묻었다. 그 반응을 즐기는 듯 제갈량은 무언가를 계속 떠들었지만 저 말들을 모두 머릿속에 담는다면 저는 분명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게 될 것이다. 그와 대화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건 처음이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의 뜻을 조합하자면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유비가 첫 고백을 하기 전, 아니, 그 마음을 깨닫기도 전부터 알았다고.

 상대도 알았는데 왜 저는 몰랐을까? 아니, 그걸 알았으면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런 원망도 해보다가 유비는 제갈량 쪽에서 '저기 주군이 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게 더 어색할 거란 걸 깨닫고 원망을 멈추었다.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또 다시 약속된 창피함 뿐이라, 얼굴에 마른 세수를 하느라 손이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완전히 제갈량의 손바닥에서 논 셈이다. 제가 고백을 할 때마다 제갈량은 그것을 알면서도 무난하게 넘겨주었는데 괜히 여러 번 시도를 해서 난처하게 만든 격이었다. 눈치도 없지. 처음 실패했을 때 그만 뒀어야 했는데. 왜 저는 제갈량이 다 알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까, 그냥 그가 못 알아챈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잠깐. 제갈량은 아까 다 알면서도 그만 두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 는 이 고백이 진행되는 게, 알면서도 저를 놀리는 게 재밌었다는 뜻일까? 그것 역시 달갑지가 않았다. 저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는 소리 아닌가. 물론 제갈량에게는 저를 받아줄 이유와 의무가 없었고, 멋대로 좋아한 건 자신이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다고 생각하니 몰려오는 서러움은 있어서 진지하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기까지 했다.

 슬픔이 부끄러움을 물리쳐서 얼굴에 몰렸던 열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만 할래." 


 제갈량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무엇인가를 시도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 고백도 하기 전에 불발된 이상, 여기서 더 할 건 없었다. 심정적으로 복잡해져서 제갈량의 시선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그는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널 좋아했던 게 사실이고 고백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야. 됐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놀려. 나도 그만 할테니까." 

 "그만 한다고요?"

 제갈량이 조용히 물었다. 방금 전까지 조곤조곤하게, 제가 얼마나 눈치가 없는 바보였으며 얼마나 티가 났는지 이야기하던 것보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였다. 유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갈량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왜 모르는 척 한 건지는 아시는 겁니까?"

 "그야...!"


 어. 그야, 뭐지? 유비는 당연하게 말을 하려다가 막혔다. 방금까지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게 싫어서. 아니면, 좋아하는 건 별로 상관이 없는데 재밌어서, 정도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얼굴을 보니 그 답이 원하는 답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뭐지? 정말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모르는 체 한 걸까? 유비는 눈을 굴렸다. 제갈량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모르시는 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겪어보라고 그런 건데. "

 "..."

 "아직 알지 못하시니 어쩌겠습니까. 이번은 제가 심한 것도 있으니, 저도 그만해야죠."


 머리를 굴렸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어서, 유비는 눈을 끔벅이며 그를 보았다. 무엇을 그만한다는 건지, 뭘 알지 못하는 건지. 제가 무엇을 놓쳤기에 그가 이렇게 행동하게 한 건가를 궁금해할 즈음, 제갈량이 부채를 가슴에 가져다대고 시선을 살짝 내리면서 말했다. 


 "달이 아름답죠?" 

 "...?"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가버렸나 싶어 재빨리 창밖을 내다 보았으나, 시간은 아직 낮이었다. 달이 떠 있지 않을 시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유비가 어리둥절해하며 다시 그를 돌아보자 그가 그렇게 행동할 줄을 알았다는 듯 제갈량은 웃고 있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유비와 시선을 맞추다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당신과 계속 함께 하고 싶습니다." 

 "...!"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비는 지금 제갈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삽시간에 얼굴이 빨개진 유비를 보며 제갈량은 작게 웃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소시지가 아니라요.

 하고, 작게 덧붙이는 것을 제갈량은 잊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고백들을 읊고 있는 게 아니라 감정 마저도 저에게 되돌려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가슴이 벅차기 시작했지만, 이건 정말 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도 없었다. 유비는 달아오르기 시작한 뺨의 열기를 느끼고서 어쩔 줄 모르며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이걸, 이걸 어떻게 모르는 체 한 거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좋아하는 이에게서 듣는 고백의 말은 마음을 벅차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제갈량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다면, 그렇다면 제 고백에 동요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모르는 체 한 걸까. 아니, 그보다 대체 언제부터. 유비는 망연한 기분이 되어 웃고 있는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는 동안 제갈량의 입술은 마지막 고백, 유비가 연습했으나 하지는 못했던 주문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것마저 들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아 유비는 멈칫했으나. 


 "사랑합니다."


 입밖으로 나온 목소리를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제갈량은 입 쪽을 가렸던 부채를 떼며 미소 지었다. 


 "주군이 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신 건 조금 실망스럽지만, 저도 모르는 척 한 게 있었으니 봐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주셔야 합니다."
 "..ㄴ, 난.."

 "모르는 척 한 이유는... 제가, 답답한 시간이 꽤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제가 어필을 해도 주군께서 전혀 못 알아채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억 나십니까? 안나시겠지요, 물론. 대놓고 좋아한다는 말을 드렸는데도 그걸 고백으로 못 알아들으셨으니..."

 "그, 그랬어?!"

 "네."


 전혀 몰랐다. 정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제갈량이 저를 좋아한 게 제가 그를 좋아한 것보다 더 오래 전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셨으면서 언제부터인가 저를 좋아하기 시작하셔서, 그런데도 좋아하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 저처럼 고생 좀 해보라고 모르는 체 했습니다. 하지만 그만 두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참기가 힘들더군요."

 "아..."

 

 그렇다면 납득은 된다. 유비는 과거의 바보 같은 자신을 혼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도.

 제 마음을 몰라주는 제갈량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을 그도 겪었다고 생각하니 원망보다는 미안함이 더 먼저 들었다. 제가 그렇게 바보였나 하는 자괴감도 몰려왔고.  

 제갈량은 그렇게 유비가 '미안해 할' 시간을 어느 정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흐려진 유비의 표정을 웃으며 바라보았지만, 조금 뒤 부채로 손을 탁 치는 소리를 냈다.


 "어쨌든, 저는 끝까지 말했습니다."


 깔끔한 목소리에 유비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할 것은 미안해 할 것이고. 들은 것은 들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저는 지금 고백을 들었다. 좋아하던 사람에게 고백을 들은 순간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제갈량은 다시 입 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주군께서도 끝까지 말씀을 해주셔야죠."


 저 미소가 왜 갑자기 눈이 부신 것처럼 보이는 지 모르겠다. 제갈량을 좋아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도 웃는 얼굴을 좋아하긴 했는데. 왜 갑자기 더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지? 유비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오므렸다가, 조금의 여유를 찾고 말했다. 


 "아까는, 언젠가 말해달라며?"

 "지금도 언젠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이릅니까?"


 그렇게 말하는 게 너무 뻔뻔했다. 아까는 더 긴 시간을 들여도 괜찮을 것처럼 굴었던 주제에 지금 바로 말해달라니. 유비는 웃음이 터졌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모든 고백을 다 듣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도, 아까처럼 입이 무겁지가 않았다. 

 유난히 제 말이 아닌 것 같은 그 고백도 이제는 무리없이 나올 것 같았다. 그를 향한 감정은 변화가 없는데 참 묘한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의 마음도 저를 향해있다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일까. 쌍방 통행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야 할 수 있는 마법의 말인 것일까. 그렇다면, 앞으로는 계속해서 할 수 있으리라. 유비는 그를 따라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랑해." 















 1이 유비의 천연 철벽이었다면 이번엔 제갈량의 인공 철벽.... 

 솔직히 제갈량은 유비가 고백하면 못 알아차릴 리가 없을 것 같다. 


 새벽동안 쓰고 있어서 오탈자나 비문 많겠지만 의식의 흐름대로니 탈고는 하지 않으련다... 


Posted by 브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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