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이었다. 

 아쉬움이 없었다고 말하진 못하겠으나 지금 순간이 세상에서 내뱉는 마지막 숨이란 걸 알았을 때 유비는 제가 참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괜찮은 삶을 산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풍족하고 넘치는 삶은 아니었으나 부족하지도 않았고, 걱정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소소한 것들이었으며 주위에 사람들이 아주 많은 건 아니었으나 그 사랑은 깊어서 받는 애정은 충분했다. 

 제가 아끼고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 속에서 무던한 삶을 살았고 한 같은 건 없었다. 이루고 싶은 것도 다 이루었고 가고 싶은 곳도 다 가보았다. 그러니 이제는 후회없이 떠날 수 있으리라. 제 손을 잡으며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생들을 가볍게 격려한 뒤 그는 작게 미소지었다. 

 물론, 딱 하나의 미련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으나. 

 그 소망은 이미 마지막 이별을 나눌 때 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묻은 채 포기하고 살아왔던 것이었으니 이젠 다 무뎌져서 괜찮았다. 

 아, 행복한 삶이었다. 이별을 이렇게 슬퍼해주는 이들이 많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저를 둘러싼 울음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유비는 눈을 감았다. 죽음은 깊은 잠에 빠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유비의 앞에는 그의 마지막 미련이 서 있었다. 못 본 지 몇 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선명한 기억 속의 그이는, 그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을 한 채 유비의 앞에 있었다. 변한 게 있다면 제갈량이 제 손을 잡아주던 늙은 동생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의 기쁨이 몰려와 유비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렇게 자비로운 세상이 있을까. 죽을 때가 다 되면 저승 사자가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로 찾아온다는 것이 참말인 모양이다. 아니면 이것도 저에게 약속되었던, 세상을 구한 이에게 제공되는 보상일까? 그는 덥썩 사자의 손을 잡고 이름을 불렀다.

 제갈량, 하고 소리치니 나지막히 주군, 하고 대답해 오는 것이 그의 형상을 한 누군가가 아니라 정말 그인 것 같아 유비는 더욱 기뻐졌다. 


 "다시 만났네, 정말로, 다시 만났어. 이제서야..."

 "...네."


 제갈량은 치미는 울음을 꾹꾹 눌러삼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그 다음 할 말을 유비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슬프지 않았기 때문에 활짝 웃었다. 이미 삶에는 미련이 없고 오히려 이리 죽게 되었으니 제갈량을 다시 보게 된 게 아닌가. 이리 마지막 소망까지 다 훌훌 털어내게 되었으니 세상에서 제가 사라지는 것쯤은 더 무섭지 않았다. 눈가가 빨개진 저의 신선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유비는 침통한 얼굴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함께 걷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꽃밭-아마도 저승길일-을 찬찬히 걸으며 그간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갈량은 천천히 그 손을 잡아주었다. 


 "제갈량은 정말로 그대로구나. 난 이리 늙은이가 다 되었는데."

 "주군께서도 변하신 게 없으십니다."
 "무얼, 얼굴이 다 쭈글쭈글해졌잖니. 이제 관절이 삐걱거려서 더 이상 비룡권은 하지도 못한단다. 그래도 어엿한 후계자를 찾아서 물려주었어. 다행이지?"
 "...예, 그렇군요." 

 "너도 아는 사람이야. 찬이의 손녀란다. 고 녀석, 할머니를 닮아서 아주 씩씩하거든... 찬이가 살아있을 때는 아주 자랑스러워했단다. 형제 같은 친구였으니 같은 날에 가자고 했는데 그리 먼저 가서... 그래도 이대로 가면 만날 수 있겠지."

 "네, 그럴 겁니다."


 천상 노친네의 말투로 말해도, 그는 재미 없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도, 제갈량은 말없이 잘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젊은이를 만나서 신난 기분을 느낀 유비는 어느새 저만 신나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고 조금 머쓱해졌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철판을 깔 수 있었다. 

 늙었다지만 이제는 영혼이 되어 씩씩하게 걷는 것이 아프지 않아도 제갈량은 저를 부축하듯이 천천히 걸었고, 그것에서 이 순간이 차라리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을 읽은 유비는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아주아주 시렸다. 저의 미련은 없음에도, 이대로 제가 가버리면 남겨진 사람이 슬퍼할 것을 알기에. 평생을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아주 힘듦을 알기에. 


 그러니 이 마음은 그대로 묻어두는 게 좋겠다. 


 젊었을 적, 입밖에 꺼내고 싶은 말이 있었다. 평생을 품고 산 반쪽짜리 사랑이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잠 못 이루는 밤에만 가끔씩 꺼내보던 그런 마음이 있었다. 토해내면 편할 것을 알지만 알아버린 상대가 괴로울 까봐 내뱉지도 못하다가, 전달할 수조차 없게 된 연모가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왔지만 제가 지금 그것을 말한다면 이제 영원히 혼자 남겨질 이이는. 

 분명 아주 괴로울 것이다. 

 신선에 비하면 짧은 시간을 살았던 저도 사랑을 삭히느라 괴로웠다. 제갈량에게 이런 짐을 맡길 수는 없었다. 간질간질,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단어들을 집어넣으며 유비는 이 마음만은 마지막까지 묻고 가겠노라는 생각을 했다. 저를 향해 보이는 그의 눈빛 속의 연모도 끝까지 모르는 척 가져가기로. 그게 이제 곧 떠날 자의 마지막 배려였다. 


 "아, 문이다."


 도란도란 이어지던 대화도 끊어지고 온기만 나눈 채 걸어가던 동행길도 곧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원히 멈춘 시간 같은 것은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멈춰버렸으면 하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삶의 마지막 상은 받았노라고 생각하며 유비는 돌아섰다. 눈을 들어 본 그의 신선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갈량이 운 것을 본 적 있던가. 보았다고 해도 가물가물한 예전의 일. 그때도이렇게 섧게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후의 이별 앞에서야 온전히 감정을 모두 비춰내는 그를 보며 유비는 오히려 미쇠었다. 그가 대신 울어주니 저는 웃겠다는 것처럼.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끝까지 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리라. 대신 그는 제갈량을 안아주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널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어."

 

 정말로. 그는 제가 가진 이 세상의 마지막 행운이었다. 여러 빛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속에서도 특별한. 


 "그러니까 너도 나로 인해서 행복했었다면 좋겠어. 많이 부족한 나였지만, 너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겨졌으면 좋겠어. 슬픈 기억이 아니라."

 "...그럴, 겁니다." 


 차마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신선의 등을 두드려주며 유비는 말했다. 제갈량은 다 쉬어가는 목으로 대답했고,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이별의 시간이 끝났으니 이제는 저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겠지. 유비는 천천히 그와 떨어졌다. 성큼성큼 다가가는 걸음이 어쩐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런 저를 바라보는 제갈량의 시선도. 

 하얀 문까지 한 걸음. 아, 어쩐지 유비는 서서가 저의 품 안에서 내뱉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때는 그녀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저 문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 역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겠다. 유비는 그 때 서서의 미소를 따라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고마웠어, 제갈량." 


 사뿐, 마지막 발걸음이 문 너머에 닿았다. 곧 모든 게 어두워졌다. 




Posted by 브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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