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고백할 때마다 본의아닌 철벽으로 튕겨내는 유비가 보고싶다.
1
날씨가 좋던 어느 날 오후, 제갈량은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상대가 유비라는 것이 고생길의 서막이었다.
3
명석한 머리 덕분에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은 빨리 끝냈다.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실전적 정의도 고민하고 방황하는 시간 동안 서서히 정립해갔다.
사랑은 예고도 전조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었으며, 책에서 읽은 것처럼 스며드는 물처럼 서서히 마음을 적시거나 깊은 늪처럼 빠르게 훅 빨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빠져 있더라.
문득 깨닫고 보니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부정기는 생각보다 별로 길지 않았다.
물론 훈련을 하다가 한심한 행동을 보이는 주군을 보면 가끔, '내가 왜 저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지' 싶지만 그런 바보 같은 모습들도 귀여워 보이는 것을 어쩌랴. 한숨을 쉬면서 '어쩌겠어,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는 제갈량은, 누군가가 '그럼 내가 저 바보 같은 사람을 데려갈게'라고 나서면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거기까지는 생각보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주군을 사랑한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음을 전할까, 아니면 묻어둘까?
대개 제 분수를 잘 알고 드림 배틀에서의 저의 역할을 잘 아는 신선이라면 주군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불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정기도 훨씬 길었을 테고, 마음을 깨달았어도 끝까지 억누르고 숨겼겠지. 제갈량이 유비를 조금만 덜 좋아했어도 그랬을 거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유비를 너무 사랑했고, 도구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가둬두기에는 너무 능력이 뛰어난 신선이었으며,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한 번 주군을 가져보기로 했다. 주군이 저를 얻기 위해 찾아왔다가 마음까지 빼앗아 갔으니 이쪽에서도 그의 마음을 요구할 자격은 되지 않겠느냐는 식의, 자기 합리화가 있음은 물론이었다.
4
"달이 아름답네요."
"응, 정말 그렇지?"
"..."
환하게 뜬 달의 밑에서 제갈량은 침묵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차피 주군의 수준을 잘 알지 않는가. 이 정도로 돌려 말하는 고백 같은 건 눈치채지 못할 것을 알았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
주군 뿐 아니라 옆에 서 있던 다른 영웅패들도-되도록이면 영웅패들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유비가 그들을 늘 떼어놓지 않고 다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제 말을 그저 달에 대한 감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으니 이 실패한 고백은 책을 잘 읽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말이라 그랬으리라. 저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의도를 읽지 못했으니 창피하지도 않았다. 번잡스럽게 부가 설명을 시도하지 않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고백은 실패했지만 유비와 함께 보는 보름달은 아름다웠다.
5
"주군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도!"
"..."
첫 고백 실패 후, 제갈량은 단어들을 신중하게 골랐다. 너무 가볍거나 무겁게 보일 수 있는 단어는 피하고 진심만을 담아 전달할 수 있는 말들은 무엇인지 고르고 골랐다. 그런 와중에 각종 연애 소설들을 섭렵하고 로맨스 드라마들을 보며 엄선한 것은 물론이었다. (유비는 제갈량이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중 제갈량이 고른 멘트는 진중한 성격의 남자 기사가 제가 섬기는 여자 영주에게 했던 말이었다. 군신 관계에서 내보이는 절절한 고백 씬이 마음에 들어, 내내 담아두었다가 조심스럽게 꺼냈는데 놀랍게도 유비는 이를 가볍게 피해갔다.
제가 훈련을 한답시고 신선 마법을 날려댈 때는 바보처럼 한 번도 피하지 못했으면서 왜 이런 것에서 철통 같은 방어력을 보인단 말이냐. 제갈량은 억울해졌다. 제 고민의 산물이 너무 쉽게 흘러간 것에 당황했지만, 그가 한 말을 진한 우정의 표시, 혹은 진한 충성심의 표시로 알아듣고 기뻐하는 주군에게 '방금 말은 고백입니다.'라고 말하기는 또 조금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계속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저런 유사 고백 같은 말로 악의 없이 제 가슴을 두드리는 주군의 미소를 보면, 거기에 당황을 던져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백을 해서 마음을 뺏어오기는 커녕 도로 뺏겼으니 이번 고백도 실패였다. 연인의 모습이 아닌 지금 이대로라도 저와 계속 함께 해준다는 주군이 좋아서 이번엔 넘어가겠지만, 포기하진 않으리라. 제갈량은 눈치가 너무 좋아서 영웅패들 중 유일하게 뉘앙스를 알아 챈 것 같은 조운을 손가락으로 퉁겨주면서 다짐했다.
6
"주군을 좋아합니다."
"나도!"
"..."
그 놈의 '나도.'
단언컨대 주군이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이유는 여자들이 그렇게 대시를 해도 주군이 알아먹지를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게 저와 같은 심정을 느꼈을 여자들이 몇이나 될까. 제갈량은 속으로 불평하며 얼굴을 구겼다. 화사하게 웃던 유비는 기쁘게 대답했는데도 얼굴을 찌푸리는 제갈량이 의아했는지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영웅패들 모두는 이제 슬슬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다 알게 되어서인지 그를 동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혈압이 올랐다.
'당신은 영웅패들보다 눈치가 없습니다, 압니까?' 그렇게 쏘아 붙이고 싶다. 솔직히 이 정도로 노골적인 말을 했으면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한다'는 말을 던졌을 때 그걸 사전적인 정의가 아닌 다른 좋아한다는 말로 알아듣는 사람이 세상에 대체 몇이나 되지? 이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이길 자신이 없다. 명언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좋아해." "나도 좋아해, 불꽃놀이."도 아니고 이건 주어도 명백하게 나와 있는데 왜 대체 못 알아 듣는 거지?
유비 자기 자신은 스스로를 누군가가 '성애적'인 의미로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걸까, 아니면 그가 제갈량을 상대로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걸까? (어느 쪽이든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이번 고백은실패다, 완전한 실패였다.
"왜, 왜 그래? 나 정말 제갈량 좋아해! 음, 제갈량은 강하고! 멋지고! 천재고, 대단하고! 잘생겼고, 키도 크고, 그리고 다정하고.. 요리도 잘 먹어주고! 날 잘 챙겨주잖아. 난 그런 제갈량이 정말 좋아!"
... 이렇게, 또 유사 고백 비슷한 것으로 고백할 의지를 뺏겨버렸으니 정말 실패였다. 분명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화가 났는데 얼굴 표정은 주인 의사를 무시한 채 흐물흐물해지고 있었으니 최근 배운 단어를 사용하자면 '환장할' 노릇이었다. 영웅심을 뺏기는 게 이런 기분일까. 고백심을 뺏겼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고개를 젓고 비틀비틀 방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뒤에서 저를 안쓰럽게 보는 영웅패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7
"주군을 사랑합니다."
"어..?"
드디어 통했나? 이 정도로 노골적인 단어를 썼으니 통했나?
눈을 동그랗게 뜬 유비를 본 제갈량은 속으로 긴장해서 주먹을 쥐었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유비의 눈은 금방 휘어지고 말았다. 그는 밝게 웃으면서 제갈량이 요즘 너무 싫어서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은 마법의 단어를 외쳤다.
"고마워! 나도!"
시발.
이라는 욕을 사용한다면 바로 이때 사용해야 겠지요. 이쯤 되면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주군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있는지, 어떤 해맑은 세계가 펼쳐져 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는지를 궁금하게 여겨야 했다. 저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고백을 하면서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를 걱정해야 하는가. 틀렸다, 벽이 너무 높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너무 시름이 깊어서 영웅패들 중 한 명이 '불쌍해..'라고 말하는 것은 봐줄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 정도로 눈치가 없다면 정말 자신이 없다. 일부러 이상한 분위기를 만드려고 괜히 쉬는 시간에 이상형 같은 걸 물어보거나 데이트 장소 같은 것에 대한 말을 꺼내곤 했는데, 성적 긴장감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기재되지도 않은 것 같은 주군은 그 때 나눈 대화들과 지금의 고백을 전혀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천재면 뭐해, 상대가 너무 바보인 걸. 이쯤 되면 그가 사실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안 받아주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아직 그를 좋아하게 되기 전,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행동했던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 사람은 그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게 성애적 사랑이 아닌 건가. 그런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나. 왜지? 아무리 주군에게 부족한 게 한 둘이 아니라지만 이런 쪽의 눈치까지 없을 필요는 없었잖아. 저처럼 이렇게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주군은 평생 연애도 못해보고 결혼도 못하고 후손도 낳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저와 이어져도 후손은 못 낳겠지만) 그러니까 그에게 사랑을 깨우쳐주기 위해서라도 더 도전하고 싶은데, 최후의 수단이 막혀서 사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살짝 불량해진 태도로 제갈량은 이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한 주군을 흘겨보았다. 자신이 그가 사랑하는 것들 목록에 들어가 있는 건 좋았지만, 영웅패들과 같은 선상의 사랑이라면 역시 싫었다. 그보다는 더 특별해지고 싶었다.
8
"당신이랑 자고 싶어요."
저녁을 배불리 먹고 조금 졸리운 시간. 영웅패들은 하나 둘 씩 졸기 시작했고 제갈량과 유비는 드라마를 시청 중이었다. 유비가 소파의 앞에서 제 무릎을 껴안은 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빈 소파에 길게 드러누울 수 있었고, 때문에 이미 전개가 예상되는, 조금 수위가 있는 로맨스 드라마에 집중하기보다는 제 앞에 앉아있는 유비의 뒷모습만을 더 열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저 드라마를 보고 배우는 게 있으면 좋으련만 나의 주군은 그러질 못하지. 졸리기 시작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해서였을까, 욕망이 너무 솔직하게 입밖으로 튀어나가고 말았다.
'아... 말해버렸네. ....들었으려나.'
다행히 영웅패들은 모두 자고 있는 것 같았고, 주군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사랑이 순수하게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게 욕정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심지어 둘은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었고, 거의 매 순간을 붙어 다녔다. 땀에 젖어 헉헉거리는 모습, 힘들어서 눈물을 눈에 달고 있는 모습, 지쳐서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 씻고 나서 반 나체로 집을 돌아다니는 모습 등을 모두 다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짝사랑하는 상대의 그런 모습 이런 모습을 모두 보았는데도 욕망을 키워가지 않는 존재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나. 그렇다면 제갈량은 신선이 아니라 보살로 직업을 바꿔야했다.
생전 처음 겪는 애욕이지만 사랑에 동반되는 그 감정을 그는 순순히 받아들였고, 이따금씩 주군이 안다면 펄쩍 뛰었을 상상도 몇 번 해보게 되었다. 입 밖으로 내지만 않는다면 주군은 그의 무표정 속에서 제가 어떻게 울고 있는지를 모를 터였다. 그럴 텐데. 드라마 속의 커플이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 묘한 분위기가 된 가운데 툭 던져버린 말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것이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런 말로 다시 도전해도 모자랄 판에 자고 싶다가 뭐야 자고 싶다가. 유비가 드라마 속에 몰두하느라 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아니, 사실은 들었어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프로 고백 흘림러인 유비는 분명 이번 그의 말 역시 흘려버렸을 테니까. 제대로 들었어도 '응? 졸려? 내 침대에서 같이 잘래?' 같은 말이나 했겠지. '그 나이 먹고도 혼자 못 자?' 같은 말은 안하는 사람이라 다행이긴 하지만, 이런 것에 안심하는 저도 좀 불쌍한 게 아닌지. 그렇게 생각하던 제갈량은 한숨을 쉬며 몸을 뒤척이다가.
미동 자세로 꼼짝하지도 않은 채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유비의 귀가 잔뜩 붉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다음 수순으로 드라마가 이제 다 끝났으며 현재 하고 있는 건 광고 뿐이라는 걸 알아차린 제갈량은 모든 잠이 다 깨버리는 걸 느꼈다. 그는 긴장으로 몸을 경직시켰다.
"제, 제갈량...."
조금 뒤 유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TV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이 순간 '빠른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제갈량으로서는 유비가 돌아봐주지 않는 게 더 다행이었다. 지금 제 얼굴은 무척 이상할 테니까.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영웅심이 부족해..?"
이건 또 무슨 전개야. 역시 이번에도 레드 라이트입니까? 그는 다소 힘이 빠진 채로 '네? 무슨 소리시죠?' 하고 되물었지만, 얼굴이 잔뜩 붉어진 유비가 휙, 하고 그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다시 어깨를 경직시켰다.
"자, 자고 싶다는 건, 성관계를 의미하는 거잖아?"
주군에게 그 정도의 성지식은 있었습니까? 그거 정말 놀랍네요.
어쩌면 그가 유비를 알게 된 이후 제일 놀라운 점인 것 같다. 의 얼굴을 따라 제 얼굴도 홧홧하게 붉어지는 걸 느끼며 제갈량은 당황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일반적으로 '자고 싶다'는 말이 그런 뜻으로 쓰이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신선인 저는 잘 자질 않으니 옆에서 함께 자고 싶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만, 유비라면 어쩐지 다른 뜻으로 해석할 줄 알았는데 그 말만은 이렇게 곧바로 알아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너무 놀라고 이상해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렇습니다만..."
큰 신경을 쓰지 마세요,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말이 헛 나간 거라고.. 그보다 영웅심은 여기서 왜 나온.
"그러니까, 영웅심이 부족해서 나랑 자고 싶다는 거 아냐? 나, 읽은 적 있어! 어떤 소설 같은 데에서, 마력을 충전하기 위해서 육체 관계를 맺는다는 거. 이것도 그럴 줄은 몰랐지만... 제갈량이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할 정도면 정말 영웅심이 부족하다는 거니까..."
!
레드 라이트가 아니라 그린 라이트였던 건가! 제갈량은 진지한 얼굴로 생각했다.
유비가 제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얼굴로 열심히 말했고 눈이 팽글팽글 돌아가는 걸로 봐서 반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제갈량은,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찰 생각이 전혀, 전혀 없었다.
자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저를 '사랑해서'일 거라는 생각은 죽어도 못하는 바보 같은 주군. 그가 끙끙거리며 찾아낸 원인이 예전에 읽은 어떤 말도 안되는 소설 설정이라는 것, 그 소설 설정과 영웅심이 비슷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멋대로 착각하여 사고하고 추리한 건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렇지만 지금 솔직한 심정으로 제갈량은 그 소설의 작가에게 꽃다발이라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눈을 딱 감고 그 소설 설정을 도용하기로 했다.
"네. 부족합니다."
곧 제갈량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연기력으로도 자신이 선계 최고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부족한 건 영웅심이 아니라 유비의 애정이지만.
"그러니까 충전해주세요."
로맨스 소설을 보면 일단 몸부터 통한 뒤에 마음을 통하는 전개가 여럿 있었다. 저라고 안될 이유가 없지. 어차피 정공법으로 열심히 도전했는데도 안되는 상대다. 그런 경우에는 먼저 다른 것부터 공략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는 제 말이 거짓말일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 못하는 유비가 끙끙거리는 것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유비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제갈량은, 그가 저를 절대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좋아. 그럼 지금... 가자."
곧 유비가 홍당무 같은 얼굴로, 하지만 비장함이 감도는 얼굴로 주먹을 쥐며 말했다. 머릿속으로 팡파레를 울리며 제갈량은 일단 오늘 역사를 이루고 나면 예전에 유비가 읽었다던 책의 작가를 찾아내서 선물을 보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었다.
그리고 몸부터 통한 뒤에 서서히 사랑을 일깨워주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영웅심 충전을 위해<라는 목적이라지만 상대가 저를 예쁘다, 예쁘다 하고 소중하게 만지고 키스하고 사랑하는 걸 티내는데 그쯤 되서도 못 알아챌 리는 없음. 몇 번 한 뒤에 본인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무지하게 삽질을 하던 유비가 어느 날 잔뜩 긴장한 채 '제갈량, 혹시 나 좋아해?' 하고 물었는데 제갈량이 정말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주군?' 했으면 좋겠다.
그럼 유비가 너무 쉽게 대답해버린 제갈량에게 잠깐 헷갈린 채 '아니~ 그 좋아한다 말고 진짜 좋아하느냐는 말이야! 그, 연인들이 쓰는 말 같은 좋아한다는 뜻 말이야!' 하고 물으면, 그때 되서도 아직 좋아한다와 좋아한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주군에게 정말 빡친 제갈량은 '예! 아주 오래 전부터요!!'하고 소리쳐버려서 잠시 후 둘 다 얼굴 완전 빨개진 채 ~~어색한 타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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